“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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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환경 딛고 객주로 대부호 반열에
흉년에 거금 들여 백성들에게 양곡 나눠줘
정조, 벼슬 내리고 금강산 유람 소원 풀워줘

조선시대 흉년 때 굶주린 제주 백성을 구제한 거상 김만덕의 이야기는 도민들에게 전승돼왔다.

그러나 단순히 역사의 기록물로 남겨진 채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주도는 김만덕기념관을 2015년 조성해 김만덕의 삶을 기리고, 나눔 실천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제주시는 김만덕 삶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제주문화콘텐츠로 조성한다.

본지는 26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뮤지컬 공연에 앞서 2회에 걸쳐 15세기에 21세기를 살았던 김만덕의 삶을 조명하고, 뮤지컬 공연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 김만덕 표준 영정.

▲역경·고난을 도전·개척 정신으로 이겨내다


김만덕(1739~1812)은 조선시대 영조때 제주성 부근에 거주하던 김응열의 자녀 3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영조 26년 이조실록에 따르면 김만덕의 소녀 시절(13세 가량) 전국에 유행병이 번져 많은 병사자가 나왔고 제주에서는 기근까지 겹쳤다. 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김만덕은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가난을 벗어나고자 객주를 운영한다. 객주는 여객들에 숙식을 제공하고 물건의 매매도 알선해 주던 곳으로 상인들이 주로 투숙했다.


자연스레 물자의 유통경로, 교역에 대한 상식을 얻을 수 있었던 김만덕은 객주업을 하며 상인들에게 물자의 알선과 매매와 위탁 등 사업도 병행하게 된다.


김만덕은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직업에 그치지 않고 객주를 운영하며 객주를 드나드는 상인들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개척해 나가게 된 것이다.


특히 그는 시기에 따라 미역과 마른 전복, 말총 등 제주 특산물을 수집해 판매했고, 일용 잡화와 백미와 잡곡 등도 사다가 팔았다. 백미와 잡곡은 창고에 저장해 뒀다가 적당한 시기에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익을 보았다.


김만덕은 나중에 육지 본토 지방과 직접 교역하는 거상이 된다. 사업에 성공한 거상이 된 김만덕은 언제나 근면과 절검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김만덕은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활 철학이었고 이를 실천했다고 기록된다.


오십대에는 육지 본토지방의 부자들과 견줄 만한 대부호가 된다.

 

 

▲ 김만덕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봉행되는 만덕제 모습.

▲전 재산 기부하다


제주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바람이 많으며 가뭄이 심해 농작물이 실패하면 흉년이 자주 일어났다. 과거에는 흉년만 들었다하면 도민들이 굶주려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조 16년부터 동12년까지 4년간 흉년이 계속돼 많은 이들이 굶주려 죽었다. 갑인년과 을묘년 흉년이 더욱 심했다.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조차 풍랑에 침몰해 제주 백성들은 아사 위기에 처했다.


이 때 김만덕은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친척과 이웃사람들을 위해 1000금(1000만원 가량)의 거금을 내놓고, 양곡을 매입한다. 그 양이 500섬 정도 된다.


김만덕은 육지에서 들여 온 양곡에서 10분의 1은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 가족들에게 나눠줬고,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가로 보내 구호곡으로 쓰게 했다.  


제주목사는 김만덕의 자선 사업게 크게 감동해 이 선행을 조정에 알렸다.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소원을 묻고 내의원의 의녀반수(內醫院 醫女班首)직을 내렸다.


김만덕은 평생 소원인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다고 했고, 소원을 이루게 된다.


이 당시 국왕 정조가 변방 제주섬의 평민이자 여인을 궁궐로 불러들여 공적을 격려하고 금강산 유람을 시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특례였다.


특히 여성이 육지에 올라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된 가운데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한 것은 김만덕의 포부를 보여주고 있다.

 

 

▲ 김만덕기념사업회가 2012년 서울시청 광장에서 ‘김만덕 나눔쌀 만섬 쌓기’ 행사를 전개하는 모습.

▲조선 여성 최고 벼슬 ‘의녀반수’ 오르다


조선시대 사회적 공헌이 큰 경우 남성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이 관례화 돼 있었지만 여성의 경우 유례가 없었다.


이에 따라 정조는 만덕에게 소원을 묻고 그것을 들어주었다. 당시 평민의 신분으로 직접 임금을 만나볼 수 없어 여성의 벼슬 중 가장 높은 내의녀 중에 최고인 의녀반수를 내린다.


당시 여성으로서 최고의 벼슬에 오른 것이다.


정조의 배려로 궁궐 내 머물며 서울 구경과 금강산 유람을 하게 된다. 이는 당시 전통적인 여성상을 뛰어 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살았으며 굶주린 제주 백성들을 위해 전 재산을 투자했던 김만덕은 당시 유교 사회 주변부에서 늘 머물러야 했던 여성의 존재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


특히 유교 윤리를 실천하는 데 앞장섰던 선비들이 만덕을 칭송해 전기를 쓰고, 시를 지어줬다는 점은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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