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의병항쟁 이후 3·1운동 이전 국내 최대 규모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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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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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강주호, 오사카 한인 노동자 계급투쟁…강진원, 대정군수 지내
강창거, 일본 차별 교육에 동맹휴학 단행…광복 후 島 민족전선 결성
▲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에 참여했던 승려와 지역 주민들의 후손 등 150여 명이 지난 2016년 10월 9일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사 의열사에서 열린 ‘제98주기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기념식’에서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투쟁 정신을 기리고 있는 모습. 법정사 항일항쟁은 일제 강점기인 1918년 10월 7일 일본의 강제적 수탈에 맞서 강창규 불교지도자와 김연일 주지, 방동화 스님 등이 주도해 승려와 주민 등 400여 명이 경찰 주재소를 습격한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이다.

 

▲강주호姜周鎬:1912~1933(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공산당의 항일활동.


본관은 진주, 강제려姜齊呂의 4남으로 중문면 상예리<웃-열리>에서 태어났다.


1929년 3월 일본공산당은 1931년 4월의 정치 강령 초안의 하나로 ‘조선, 대만 등의 완전 독립’을 내세웠다.


1931년 12월에 그는 전협全協 화학노조에 가입하고 1932년 12월 현호경玄好景(성산포)의 권유로 일본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동당 동지구 문서배포계에 소속하였으며 1933년 현재 당에서의 지위는 남지구원 및 동지구 책임이며 또 시위원회 배포계를 담당, 간사이 지방위원회 문서배포계에서 활동하던 중이다.


1933년 9월 22일에 검거되어 모진 학대로 동년 12월 4일 오사카 북구에서 사망할 당시 미혼이었다.

 

앞서 일본 공산당은 일본 안의 한인 노동자들과 협동 관계를 수립할 임무가 있다고 하였다.


일본에서 저임금을 받고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착취를 당하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민족적, 계급적 투쟁은 이미 훌륭한 전례가 많이 있었다.


특히 1934년 오사카<大阪>에는 한인 교포가 15만 가운데 약 40%가 제주 출신들이다.


당시 위원회에는 현호경玄好景(성산)이 책임자로 있고 조합부장에 강상호姜相鎬(제주시 월평), 문서배포계 강주호姜周鎬(중문면 상예) 등이 노동 운동을 통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진원姜鎭元:생몰년 미상, 대정군수. 1878년(고종15) 2월 이우식李友植(일명 이언길李彦吉)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80년 9월에 떠났다.

 

한편 1864년(고종1) 8월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승격하여 군수郡守를 두고 제주목의 관할에서 떠나 직접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하에 두었다.

 

본시 목사가 있어 전도 삼읍을 통할하던 특수 지역인데 변지에 군수를 둔 이후에는 제주목과 양군 사이의 마찰로 행정이 문란해져서 1880년(고종17) 2월 양군을 다시 현縣으로 환원하여 현감을 두었다.

 

▲강창거姜昌擧:1910(융희4)~?, 가명은 강양일姜良一, 본관은 진주, 강제원姜齊元의 차남으로 산북 용담리<한두기>에서 태어났다.

 

제주농업학교의 항일 학생운동 및 서울 중앙고보 학생 전위동맹과 고려공청高麗共靑의 항일활동.

 

강창거는 1925년 4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 2학년 때 미마<美馬米吉> 교장이 순직으로 교장 사무취급을 보던 일본인 야나기다<柳田彦二>의 민족차별 교육과 실력 부족을 내세워 1926년 6월 25일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동년 7월 13일 주모자로 지목 받아 7명의 학생과 함께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동년 9월 서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1929년 3월 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9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전라남도 목포에서 제주기선상회 사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동년 5월 서울에 올라갔다.


1931년 6월 중순경 정관진의 지도하에 서울 창신동 221번지 숙소에서 경성세염京城洗染 노동조합의 인계를 요구하였다.


사립 양정養正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수명을 모아놓고 공산주의 의식을 교양하였다.


이런 일이 탄로되어 동지 김기범(20·삼도), 강위황(22·하예)과 함께 일제 당국에 의해 1932년 3월 붙잡혀 그는 동 9월 19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 6월의 옥고를 서대문형무소에서 치르고 1934년 9월 19일 만기 출옥하였다.


광복 직전에 옥중 순국한 강창보姜昌輔의 아우이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 동대문구에서 살다가 1947년 2월 23일 제주도島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 안세훈安世勳 위원장이 의사 진행하면서 내빈 축사로 도지사 박경훈朴景勳과 서울에서 내도한 중앙 문화협회 강창거의 격려사가 있었다. 1949년 말경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강창규 사찰 창건 기념비.

▲강창규姜昌奎:1872(고종8)~?, 무오년 법정사法井寺의 항일운동의 불교지도자.


안덕면 사계리<거문-질> 태생, 승려. 법정사 항일운동의 최고지도자 김연일金蓮日(경북 영일)의 장인, 강창규는 한문을 수학하였고, 1892년 20세에 전라북도 임실군 죽림사에서 박초월朴初月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893년 박만하朴萬下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았으며 이후 경상남도 하동군 칠불암과 강원도 간성군 건봉사 등지에서 수선 안거를 하였다.


관음사에서 김석윤金錫允과 함께 활동하다 항일의식을 가진 승려들을 이끌고 법정사로 이주하였다.

 

강창규는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선봉대장으로 거사 당일 현장 지휘자였다.


강정江汀리<가래-촌>와 도순리<돌-숭이> 사이의 대천大川 서안西岸의 전선 및 전신주 2개를 절단하도록 지시하여 서귀포와 제주읍내 사이의 통신을 두절시켰다.

 

또한 하원리<오름-골>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을 구타하도록 지시하여 창상創傷을 입혔다.

 

게다가 강창규는 중문경찰관 주재소駐在所의 건물과 기구·문서 등을 파괴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특히 강창규는 경찰관 주재소의 지붕의 짚을 뽑아 성냥으로 불을 붙어 직접 주재소를 불태웠다.


그는 거사 현장의 실제 지휘자였음에도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고 4년 3개월 동안 피신하여 지역주민의 보호가 있었음으로 짐작되고 있다.


1922년 12월 27일에 서귀면 상효리<상-쉐둔>에서 체포되었다.

 

강창규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1919년 2월 4일 궐석闕席 재판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24년 칙령勅令 제10호에 의해 징역 6년으로 감형되었다.


1922년 12월 31일 형이 집행되어 1928년 12월 12일 잔형殘刑 기간 1개월을 남기고 목포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5년 11개월 8일 동안 복역하였는데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중 가장 오랫동안 형을 살았다. 이는 선봉대장으로 현장을 이끌었던 행적 때문이다.


그는 출옥 이후 제주도로 돌아와 1943년 제주도 대정면 동일리<동-날웨>에 서산사西山寺를 창건하였다. 1951년 대한불교 제주교무원 고문顧問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에 사망하였고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출가 승려로 근대 제주불교 초창기 활동의 정점인 인물이다.


한편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검거된 총인원은 66명으로 대부분 불교도와 선교도들이다.


의병 항쟁 이후 3·1 운동 이전에 국내에 일어난 여러 투쟁 중 대규모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민족 종교인 선도교를 사교 집단으로 매도 격하시켰으며 이 운동을 가혹하게 대처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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