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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십여 년 전 겨울 러시아의 카프카즈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인데 150㎞ 정도 떨어진 시골 교회를 찾아가야 했다. 우리 일행은 자동차를 타고 눈 내리는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많은 눈이 내리면서 길이 점차 안 보이게 되었다. 그래도 눈이 쌓인 형태를 따라 길이 어디인지를 분별할 수는 있었다. 길의 흔적이 희미해졌을 때는 전신주 곁을 따라 달리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만큼 더 가다보니까 전신주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어디가 길인지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자동차는 계속 달렸다. 익숙한 길이라서 그런 것이겠지 생각하면서 불안감을 삭히려 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눈을 감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 더 달려가는데 자동차가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좌우로 한두 바퀴 도는가 했더니 거꾸로 뒤집히는 듯했다. 그렇게 미끄러지고 구르고 하다가 자동차는 눈 쌓인 어딘가에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뒷좌석 가운데 앉았던 나는 몸이 거꾸로 된 채 꼼짝할 수 없었다. 머리와 목으로 온몸을 받힌 상태에서 좌우를 보니까 차장 밖으로 하얀 눈만 보였다. 수북이 쌓인 눈이 자동차를 꼼짝 못하게 가두고 있어서 문을 열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조금 전에 우리는 내리는 눈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벌판을 달리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러니까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거꾸로 뒤집힌 자동차 안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서 평정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한 10여 분 쯤 지났을까, 밖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나고 차창의 눈이 걷히면서 무언가가 보였다.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차창 밖으로 러시아 경찰이 나타났고, 우리는 한사람씩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러시아 경찰은 먼저 다친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낡은 소형 버스에서 십여 명의 러시아 남자들이 내리더니 저들끼리 의논을 했다. 그리고 버스에 있던 굵은 밧줄을 가져오더니 눈 속에 빠진 자동차를 당겨 길 위로 올려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된 것이다. 자동차 앞 유리에는 커다란 금이 가고 다른 유리창들은 깨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시동은 걸렸다. 그 정도까지 확인한 다음에, 그들은 밧줄을 챙기더니 버스를 타고 떠나고 말았다. 러시아 경찰도 택시를 불러주더니 더 이상은 아무 말 없이 떠나고 말았다.

처음에 나는 위기에서 구조된 것에 감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남자들과 경찰에 대해서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를 이렇게 구해주고 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떠나고 마는 것인가?” “러시아 경찰은 부패한 권위주의자들이라 하던데 이 경찰은 어떻게 된 것인가?” “러시아 남자들은 보드카만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들이라 하던데 이 남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눈 내리는 벌판에서 나의 머리속에서는 이미지 갱신 작업이 급격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쩌다 영화나 TV에서 러시아 경찰을 보면, 요즘의 나는 특별히 나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눈 내리던 벌판에서 이미지 갱신 작업이 확실히 이루어져서인지….

격렬하고 급작스런 변화가 쉬임 없이 일어나고 거꾸로 처박히는 듯한 사건들과 재판이 오고가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서도 이미지 갱신 작업이 일어났으면 해서 그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과 균열이 이대로인 상황에서는 올림픽이나 남북 대화가 어렵게만 보인다. 어떤 사건을 통하여 서로의 이미지를 갱신해가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희망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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