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삶 터전 잃고 쌓은 '통곡의 벽'...성안 생활은 비참
(5)삶 터전 잃고 쌓은 '통곡의 벽'...성안 생활은 비참
  • 고상현 기자
  • 승인 2018.0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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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동 인다마을 4·3성
군 '초토화작전' 아라동 대부분 전소
아라택지개발 등으로 현재 성벽만 남아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기원하면 표석을 세운다"

찬바람이 불던 지난 27일 오전 제주시 아라1동의 거리는 연달아 오가는 차들로 복잡했다. 왕복 6차선 중앙로를 따라 골목골목 새로 지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건물마다 새 간판이 달려 있고, ‘임대 문의’ 등의 현수막이 붙어져 있어 이곳이 최근 번성하고 있는 도시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란 9길을 따라 저마다 한껏 멋을 낸 신축 건물들 사이로 20m 길이의 나지막한 돌담 하나가 생경하게 서 있다. 남쪽으로 고층의 아라 원신아파트와 높다란 담벼락이 곧추서 있어서 그런지 한층 더 낯설어 보였다. ‘인다마을 4·3성(인다성)’이라고 써진 표석만이 왜 돌담이 이곳에 서 있는지 얘기할 뿐이었다.   

 

 

▲ 27일 오전 김명석 아라동통장협의회장(왼쪽)과 김영부씨가 인다성벽 앞에 놓인 4·3 표석과 나란히 서 있다.

■비참했던 성안 생활
4·3 당시 아라동(아라리) 지역은 1구와 2구로 분리돼 있었다. 1구는 웃(위)인다와 알(아래)인다, 구산마을, 장구마을 산천단이 있었다. 2구는 간드락, 월두, 걸머리 등으로 이뤄졌다. 당시 200여 호의 집에 약 1000여명이 살았다.

 

하지만 1948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인다마을 등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탔다.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연고자가 있는 오라리, 광양 등지로 피난 갔다. 그 이전부터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다녔던 청년층이나 옮길 데가 마땅치 않은 주민들은 그냥 마을 주변 산속에 숨어 살다가 토벌대에 발각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봄 피난 갔던 아라 1·2구 주민들이 현재 이곳 알인다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군 당국은 주민들과 무장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감시하기 위해 성을 쌓아 전략촌을 이루게 했다. 주민들은 낮에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고, 어두워지면 피난지로 돌아가 잠을 자는 생활을 수개월간 반복했다. 그리고 그해 5월 높이 4m, 동서 길이 150m, 남북 길이 200m의 긴 직사각형 형태의 성을 완성했다. 성은 현재 중앙로를 중심으로 남문, 북문이 있었고, 각 성문과 성벽 모퉁이 등에 총 8개의 망루가 있는 형태였다. 성안에는 임시로 만든 움막 형태의 함바집이 일렬로 줄지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현재에는 20m 길이의 성벽만 남은 상태다. 


이날 인다성 근처에서 만난 김영부씨(78)의 부모님도 당시 광양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성을 쌓았다고 했다. 김씨네 가족은 원래 장구마을에 살았다. “8살이었을 때 초토화 작전으로 집이 다 불탔어. 안 내려가면 빨갱이로 몰아서 죽였으니깐 광양으로 내려가서 남의 집 쇠막(외양간)에서 살았어. 봄 되니깐 부모님이 번갈아가면서 성벽을 쌓으러 갔지. 그때 한 집당 한 사람씩 뽑아다가 돌 쌓게 했거든. 한 분이 성벽 쌓으러 가면 한 분은 땔감 같은 거 주어다가 시장에 팔아서 나 먹이고 그랬지. 참 고생 많으셨어….”


그렇게 주민들이 힘들여 완성한 인다성에는 아라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월평동, 오등동 등 다른 지역 주민들도 살았다. 김씨는 성안 생활이 비참하고, 고됐던 것으로 기억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원시생활이야. 나무 세워놓고, 그 위에 억새로 지붕 만들고, 맨땅에는 검질 깔고 거기서 그냥 먹고 자고 그랬어. 수백 명이 살다 보니깐 움막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비좁기도 했고. 낮에는 성 밖에 나가서 밭일 하고. 밤에는 15세 이상 70세 이하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번갈아가면서 보초를 섰어. 무장대들이 습격하지 않나 감시하는 거지. 1시간에 한 번씩 각 망루에서 ‘1분초(소) 이상 무’라고 외쳤던 게 생각나. 먹을 것도 없어서 풀 베다가 미군이 준 밀가루, 강냉이가루로 죽 써서 먹고 그랬지.”

 

 

▲ 김평국 할머니는 지난 26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4·3 당시 전주형무소에 끌려갔던 아픈 기억을 증언했다.

■너무 억울한 4·3이라
26일 오전 자택인 제주시 아라1동 아라주공아파트에서 만난 김평국씨(88·여)의 삶은 기구했다. 웃인다라 마을에 살았던 김씨는 강경진압작전으로 마을이 불타 없어지기 전에 어머니, 외할머니, 친할머니, 여동생 둘과 함께 친척이 살았던 남문통으로 내려가 살았다. 그러고는 얼마 안 있어 중산간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어떤 영문인지 어머니와 동생들은 곧 풀려났지만, 김씨는 1년형을 받아 전주 형무소까지 끌려가 수형인 생활을 했다. 그때가 19살이었다.


“비좁은 감방 안에서 한 20~30명 되는 사람하고 며칠을 같이 살았어. 매일 한 명씩 데려다가 고문을 하는 거라. 여자인데 산 사람(무장대) 얘기를 뭐 알아. 계속 얘기하라고. 소가죽으로 만든 채찍(쇠좀매)으로 계속 때려. 나는 계속 모른다고 했지. 그러다가 어느 날 트럭에다 태워 그러고는 목포로 배 타러 간대. 그러고는 전주 형무소까지 가서 10개월 정도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왔지. 아직도 비 올 때면 매 맞은 곳이 욱신거려.” 그렇게 돌아온 고향 마을은 불에 타 없어지고, 가족들은 인다성에서 고생스럽게 움막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씨의 움막은 현재 제주시 아라1동 나우리마트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나는 집행유예 걸려 있어서 움막에만 틀어박혀 지냈어. 나를 고문한 사람 이름을 기억하고는 찾아갈까도 생각했는데 무서워서 가지는 못했지. 나한테 사상죄라고 하는데. 참 기가 막히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왜 사상죄냐. 참 억울한 4·3이라.”

  


■아픈 역사 반복 않기를
군 당국의 강경진압으로 무장대가 줄어들면서 주민들은 차츰 성 밖을 벗어나 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집을 많이 지으면서 인다성의 돌들이 많이 사용됐다. 도로도 확장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도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인다성 안에 원신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지금의 성벽만이 남게 됐다. 이마저도 2009년 택지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나서면서 지켜냈다. 이후 2014년 ‘우리마을 바로알기’ 특화사업 등을 통해 지금의 표석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했다.


당시 주도적으로 인다성을 지켜낸 이는 김명석 아라동통장협의회장(53)이다. 대대로 인다마을에 살았던 그의 가족 중에 할아버지가 4·3 당시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그는 27일 인다성 앞에서 기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도 4·3 얘기만 하시면 많이 우셨어요. 저는 사실 4·3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비극은 또 반복되지 않나요? 인다성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까지 지킨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에요. 다시는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비극을 우리 후손들에게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고요. 이렇게라도 지켜내지 않으면 앞으로 개발 광풍 속에서 4·3 유적은 활자를 통해서만 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의 의지가 담긴 표석에는 다음의 글귀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 표석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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