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공산주의자로 민족 해방 운동에 기꺼이 몸을 던진 거목
(26)공산주의자로 민족 해방 운동에 기꺼이 몸을 던진 거목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창보, 3·1운동에 애국심 불타 소년선봉대·해녀 항일 투쟁 지도
강창용, 제2대 국회의원 당선, 재경위 활동…도청 신축 기여

▲강창보姜昌輔:1902(광무6)~1945(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의 항일활동.


강제원姜齊元의 장남, 산북 용담리<한두기>에서 태어나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문하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9년의 3·1 운동에 자극되어 제주도내 신진 엘리트들에 의해 1921년 반역자구락부를 비밀리 조직할 때 창립 멤버로 항일 청소년 활동을 시작하고, 1923년 소년선봉대를 조직하여 그 지도에 임하였다.


또 1925년 3월 11일 제주시내 급진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할 때 교양부 간사로 강창보와 송종현이 이를 담당하였다.


이는 본도 최초의 사상 단체로 그 강령이 “무산자를 본위로 신사회의 건설”을 표방하였는데 일제는 이 강령이 불온하다고 하여 동년 4월 17일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이 일로 동년 9월 동지 김택수金澤銖(일도), 송종현宋鍾炫(신촌)과 함께 징역 6개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소년선봉회 집행위원으로 제주소년연맹의 집행위원, 또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강창보는 송종현, 김택수, 장종식張鍾植, 김병원金炳媛, 오대진吳大進, 김정로金正魯, 윤석원尹錫沅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세포로 활동하였다.

 

제주도내에 있어서도 초기 공산주의 운동자들은 거의 가정이 부유층·지식층에 속하고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신진 엘리트라는 사실이다.


사립 중동中東학교에서 수학, 1927년 8월 송종현의 권유로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해녀 항일 운동의 후견 단체 혁우동맹革友同盟의 실제적인 지도자였다.


1928년 9월 제주청년연합회 서무부 상무 위원 및 집행 위원이 되었으며 동년 8월 26일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으로 경기도경찰부에 의해 검거되어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1월 출옥된 후 제주에서 당 재건 운동을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동년 9월에는 세금 불납 운동, 묘목 강제 배포 반대 운동 등 농민 운동을 지도하고 동년 11월부터는 세 차례에 걸쳐 해녀의 항일 투쟁을 지도하였다.


1932년 5월 2일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마침 5월 6일 오전 2시경 유치장을 탈출했다.


서귀포 이도백李道伯의 집에 은신 중이었다. 거지·엿장수·미치광이 등으로 변신하여 강병희姜炳喜의 기지로 짐짝 속에 감추어져 복목환伏木丸 편에 일본 오사카로 탈출하였다.


후일 이 일이 탄로되어 강병희는 구속되고 징역 8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탈출한 강창보는 몰래 도쿄에 들어가 송성철宋性徹, 김여환金麗煥 등과 비밀 접촉, 일본공산당과 연계하여 전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 토건 노조의 노동 운동에 참가하면서 ‘조선신문’ 발간을 지도하였다.


1943년 국내 잠입을 기도하던 중 동년 4월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大田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1월 7일 오전 10시 30분 옥중순국獄中殉國하였다.


강창보는 김문준金文準, 김시용金時容 등과 함께 공산주의자로 민족 해방 운동에 기꺼이 몸을 던졌던 제주가 낳은 삼대거목三大巨木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창용姜昌瑢:1914(일제강점기)~2000, 정치가, 본관은 진주,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났다.


강창용은 16세의 나이로 당시 애월면장 김도현金道鉉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철이 들면서 부모님 몰래 상경하여 한성漢城상업학교의 입시에 합격하자 부모도 학비를 보내어 주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을 배척하는 학생운동이 자주 발생하여 학생회장의 신분이어서 당국으로부터 더욱 주목을 받았다.

 

한번은 학생운동의 주동자로 일경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다행히 장인丈人이 애월면장이어서 보증을 서 주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


따라서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0대 1이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취업이 첫발을 디딘 곳이 전매청專賣廳이었다.


첫 발령지인 함경북도 신산新山전매청에 부임하였다. 귀향하라는 부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35년 애월면 서기로 재임하게 되었으나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생활을 해야겠다는 꿈은 버릴 수가 없었다.

 

면서기를 2년 만에 그만두고 월급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부모 몰래 산지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1년 3월에 대학 4년 과정을 졸업하고 돌아와 금융조합연합회 이사 견습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3개월 동안의 견습을 거쳐 1942년 3월 경상북도 해양海陽조합에 첫 발령을 받았으나 당시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때라 식량 증산을 독려하면서 공출을 강요하는 바람에 우리 농민들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일본의 수탈정책을 증오하면서도 공출제도의 정량만을 받도록 힘쓴 관계로 경상남도 진영進永, 하동河東, 양산梁山, 무림茂林 등지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농민편에 서서 농민의 상담역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대학을 도쿄의 법정대학法政大學 정치경제학과로 나온 터라서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할 뜻은 있었으나 장인인 전 입법의원 김도현金道鉉이 입후보하는 바람에 나서지 않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게 되자 북제주군 을선거구乙選擧區(애월, 한림, 추자)에서 입후보하였다.

 

 

▲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제주도 전역은 일본군에 의해 요새화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제주에는 일본군 제58군 소속 6만 6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사진은 그해 10월 미군이 일본군 제58군의 탱크 등을 무장해제하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은 제주4·3 관련 미국 자료 수집 공동 조사반이 미국에서 입수해 공개한 것이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헌국회의원의 2년 임기가 끝남에 따라, 동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제주군 갑구 8명, 북제주군 을구 10명, 남제주군구에서 9명이 입후보해서 북제주군 갑구(제주, 조천, 구좌)에서는 김인선金仁善(28, 국민회)이, 또 남제주군에서는 강경옥康慶玉(44, 무소속)이 당선되었다. 강창용은 4636표를 득표해 당선됐다.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3명은 1952년에 창당한 자유당에 모두 입당하였고 강창용 의원은 주로 재경財經분과위원과 교체交遞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회 재경財經위원이던 강의원은 재무부장관에게 간청하여 제주도는 병참兵站 전략기지라는 점과 많은 피난민으로 인한 공공시설 부족 등을 내세워 도청 신축자금을 얻어내어 도지사의 행정에 힘을 실어 주었다.


1951년 추석 때 애월로 귀향하려고 나섰는데 어떻게 교통난이 심했는지 겨우 특별 배차로 뜻을 이루었다. 이때 버스회사를 설립해 도민의 수족 구실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상업학교 출신이어서 경영 방법도 익숙해질 것이고 또 국회 교체交遞위원으로서 운수행정에 대한 지식을 터득한 상태여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1952년 4월 18일 35인승 6대로 영주운수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타계할 때까지 이를 운영하였다.

 

강창용 의원은 정치생활을 접은 후 농협農協중앙회 고문으로 1년을 하고 증권거래소 초대 이사로 3년여를 지냈다. 아들 강영철은 제주시의원과 제주시의회의장을 지냈다.


영주瀛洲운수사 개업기념으로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이 써준 휘호揮毫 “行旅便利 人生必慮 國家民族 實利賴之”(나들이하는데 편리함은 삶에서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와 민족에게 실리를 찾아주고 그것에 의지하게 되는 길이다) 이 진리를 항상 깨달으며 평생 이 사업에 정진하더니 86세로 이승을 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