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총리의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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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성 재 뉴질랜드 언론인
올해 37세의 재신더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얼마 전 자신의 임신 사실을 공개했다. 출산 예정일은 오는 6월이고 아기의 아빠는 동거 중인 방송인 클라크 게이포드다.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정권을 잡은 아던 총리가 불과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첫 아이까지 낳게 됐으니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두 가지 큰일을 동시에 해낸 셈이다.

우선 30대 여성이 총리가 된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현직 총리가 아이를 낳는 건 더 드문 일이다. 아던 총리 이전에 여성 국가 지도자가 현직에 있을 때 아기를 낳은 건 지난 1990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전 총리 정도가 유일하다.

어느 나라든 총리에 오를 정도가 되면 정치인으로도 연륜이 쌓일 수밖에 없는 만큼 여성이면 출산 적령기를 넘겼을 확률이 높다. 또 국가 지도자를 꿈꾸는 여성 정치인들 중에는 아기를 낳고 키우는 게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출산을 포기하는 일도 없지 않다.

뉴질랜드에서는 이전에 노동당 내각을 이끌었던 헬렌 클라크 전 총리가 그런 경우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정치에 올인하기 위해 자녀에 대한 꿈을 버렸다. 옛날 한국에 남장을 하고 다니던 여성 정치인이 있었던 것처럼 정치와 일을 위해 여성성을 부분적으로 포기한 셈이다.

하지만 아던 총리는 정치와 일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기를 낳고 나면 6주 출산 휴가도 갈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아무리 국사가 중하다 해도 엄마로서의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정치인과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모두 하겠다는 건 분명히 진일보한 발상이다. 남녀평등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뉴질랜드의 한 정치 평론가가 여성들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남녀평등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곧잘 임금격차나 유리천장만 걸림돌로 들먹이기 쉽다.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여전사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양성평등의 목표를 향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젊은 여성 총리가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는 지난해 선거를 앞두고 가진 방송 인터뷰에서 출산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고 현대를 사는 여성들에게 직장에서 그런 질문에 대답을 강요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을 만큼 입장이 확고하다. 아이를 언제 낳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여성들이 결정할 일로 취업 기회의 전제가 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한 시민은 낡은 사고방식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를 낳기 전에 결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결혼식도 안올리고 아기부터 낳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다. 또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다면 총리가 될 수 있는 야당 대표직부터 맡지 말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 선거에 이기고 나서 몇 달 뒤 아기를 낳는 건 유권자들에 대한 배신행위라고까지 쏘아붙인다.

한 나라를 잘 이끌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기를 낳아 잘 기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기를 낳아 기르면서 한 나라를 잘 이끌어가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아던 총리가 아기를 낳으려는 건 그 어려운 두 가지 일을 모두 잘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남녀평등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상징이 된다면 더 말해 무엇 하랴.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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