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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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겸 수필가

큰 맘 먹고 손대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한다. 낡은 일기장 한권에 손이 간다. 겉표지에는 커다란 눈을 가진 소녀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생각에 잠겨 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오래전 기억들이 소환되고 나는 꿈같은 시간 여행에 빠지고 만다.


스물여섯 나는 서울의 팍팍한 생활로부터 겨우 탈출해 있었다. 우당 도서관 창문으로 들어오는 나무들의 풍경이 따뜻한 위로가 되던 때였다. 용감하게 상경을 감행한 내가 지니고 있었던 것은 지방대학 졸업장 뿐 이었다. 그것으로는 소위 그럴듯한 직장을 얻기에는 충족시켜야할 조건들이 너무 부족했다.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늦게야 깨닫는 순간들이 많다. 산다는 것은 통과의례마냥 수많은 시행착오를 치르며 조금씩 완전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것인가?


스물여섯 나는 교육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기로 했다. 쉰셋 나는 그것이 꽤 괜찮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얼마 되지 않아, 스물여섯 나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다며 대학원을 포기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스물여섯이란 나이는 스물여섯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 젊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또  부정적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맥아더 장군은 70이란 나이에 인천 상륙 작전을 펼쳤고, 피천득 시인은 50이 넘은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연히 대학 동기였던 미화라는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친구는 50이 다 되어 공무원시험에 도전을 했고 그리고 합격 했다는 것이다. 나이는 열정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만 몰랐던 것인가?


아홉 살 때는 열 살이, 열두 살 어느 날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빨리 흐르기만을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그렇게도 가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간들을 언제부터인가 붙잡고 싶어졌다. 스무 살 이후였으리라. 아마도 그때부터  인생의 비밀을 어렴풋이 눈치 챘던 것은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만으로는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칠이 벗겨지고 모퉁이가 조금씩 닳아 떨어져 나가는 오래된 가구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의 생채기를 남긴다. 아픔인 동시에 훈장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가구는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견고한 믿음마저 느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강물처럼 무심한 듯 흐르지만 부드럽게 세상을 감싸 안는 마법을 부린다. 엄격하던 삶의 잣대조차 코스모스 사이를 흐르는 산들바람을 만든다.


수능을 치른 아들은 스물여섯 내가 그랬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열아홉 살 인생에서 수능은 전부였고 실패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다. 아이는 공허한 박탈감과 분노로 뒤섞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는 죄인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 엄마, 미안해.”


엄마는 흐르는 강물과 바람에 가볍게 휘어지는 풀잎들을 이해한다.


“ 왜 그렇게 풀이 죽었나? 시험 한번 못 봤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시험 한 번 더 보자. 괜찮아.”

 

올라 온 길을 찬찬히 뒤 돌아 본다. 허둥대다 보면, 서성거리다 보면 인생은 그냥 흘러가버리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스르륵 사라져 버리고 꽃들은 피고 지고, 또 피어났다.


낯 뜨겁게 하는 부끄러운 순간들, 안타까운 순간들을 대면한다. 가슴 벅찬 순간들도 반짝거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나온 모든 순간들은 애틋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오랜만에 먼지를 닦은 나의 오래된 기억들이 내방 한쪽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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