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지역사회에 대규모 부지 희사…‘노블레스 오블리주’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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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학 공원-제주농업중 교사 강창우, 3·1시위 앞장…4·3 뒤 행방불명
‘제주농원’ 인수해 도내 초창기 감귤농업 선도
땅 26만㎡ 기부…기업 경영으로 쌓은 부 환원
▲ 서귀포시 강정동에 위치한 강창학종합경기장 A, B 구장 모습. 부지 내 공간은 생활체육을 즐기는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강창우姜昌祐:1920(일제강점기)~?, 본관은 진주, 조천면 대흘리<눈-흘>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 제주농업중학교(6년제) 실과담당 교사, 해방 이후 수석교사로 모교母校에 재임, 남로당 비밀당원 앞서 1939년 3월 7일 제주농업학교를 수석首席으로 졸업하여 이어 수원고농水原高農을 마쳐 일제 말에 모교 교유敎諭로 발령되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최계순·문영현·이시형·강창우 등만이 있었다. 일본인 교직원이 모두 귀국, 그가 이시형과 더불어 교장 최계형崔季淳(제주-성안, 지방법원장 최원순崔元淳의 친형, 교장 최광식崔光植의 숙부)의 보좌에 임하였다.


강창우姜昌祐는 동료 교사 고칠종高七鍾(이호)·이시형李蓍珩(애월) 등과 민주청년동맹의 후견자였다.


1947년 초에 시내 학생들(제농, 교원양성소, 오현중, 제주중, 제주여중)의 양과자洋菓子 반대운동과 친일파親日派 숙정肅正운동을 전개하더니 그는 1947년 4월 21일에 3·1시위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검거, 그에게 각 체형 6개월을 구형했다.


1948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전위대前衛隊로서 제주3·1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전해지기를 미美군정청에 의하여 남로당 학생부의 책임을 지고 학교를 물러나 제주4·3사건 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필자의 변): 미군정 당시인 1947년 9월 1일 6년제인 제주농업중학교 제1학년 농과에 입학을 하였다. 제주3·1시위와 발포사건으로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 상태이다. 선배들이나 1년 선배인 종형으로부터 하는 얘기 가운데 강창우姜昌祐(대흘)·고칠종高七鍾(이호)·이시형李蓍珩(애월)·김학림金學琳(오도롱)·한병택韓秉澤(조천) 등의 이름이 들리고 이미 학교를 떠난 상태라서 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1학년 농과 담임은 김경철金京哲(서북 출신), 축산과 담임 홍남부洪南富(한림:모교 출신)인데 이들도 육지부로 떠났던 혼란기였다. 미군정에 의해 재판을 받은 교사가 여러 분이 있었다고 하나 세상을 알기에는 너무나 어린 상태였다. 후일 좌우 이념대립이 너무나 치열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강창학 康昌鶴:1927~2003. 서귀포시 하효동 출신의 사업가로 본관은 신천(信川), 부친은 강서구(康書龜), 어머니는 김씨이다.


부친이 재혼함에 따라 할머니와 살던 선생은 서귀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3월 일본 일신상업학교(日新商業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밀감 과수원인 ‘제주농원’을 인수해 초창기 감귤농업을 주도했다.

 

그 무렵 서귀포시 도순동 출신의 고여아씨와 결혼했다.

 

성산포 인근에 통조림공장과 서귀포 정방폭포 상류 부근에는 전분공장을 세웠고 ‘제주농원’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조금씩 땅을 매입해 관상목을 재배하면서 차츰 부를 축적해 나갔다.

 

1954년 3월 흥신산업사를 설립하였고, 1957년에는 군납 통조림공장을 인수, 1959년 ㈜흥신식품공업사를 열면서 사장에 취임했다.


선생은 제주상공회의소 위원을 지내는 한편 제주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제주 지역 상공인들을 이끌었다.

 

또한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서홍동 소재 4만9500㎡ 규모의 과수원을 가꾸는 일과 흥신산업사·대창산업사 등 중소기업을 경영하며 부를 쌓았다.

 

선생은 지역발전을 위한 기부와 소외된 사람들을 꾸준하게 돕는 등 부의 지역사회 환원에 앞장섰다.


전국문화인총연합회 서귀포지부 초대지부장을 맡아 남제주군 예술제, 탐라예술제, 한라문화제 개최 비용 대부분을 부담한 일은 문인들 사이에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서귀포보건소(현 서귀포시평생학습관) 부지, 제주영락교회 부지 구입에 기여했고 현재 서귀북초등학교 부지도 기부하는 등 지역사회에 큰 선물을 안겼다.


1985년에는 서귀포시 상효동 1421-7번지 일대 6626㎡에 현대식 노인복지시설인 성요셉 양로원을 지어 제주구천지교회유지재단에 헌납, 소외된 노인들을 보살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88년 9월 서귀포시 강정동 1461번지 일대 토지 26만121㎡를 서귀포시에 기부해 서귀포시가 스포츠 산업 육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서귀포시는 ‘중앙공원’(면적 47만1300㎡)이라고 불리던 공원 명칭을 1999년 7월 ‘강창학 공원’으로 변경했다. 선생은 2003년 1월 9일 7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정부는 2003년 1월 11일 선생의 기부와 지역발전을 위해 세운 공을 인정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한편 ‘강창학 공원’은 공원의 기능에 따라 2004년 2월 11일 강창학 체육공원으로 지정됐다. 축구장뿐 아니라 88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청소년수련관, 한국야구명예의전당, 인라인 스케이트장, 궁도장, 야구장, 미니 축구장, 산책로, 운동기구 등이 조성되어 있어서 생활체육을 즐기는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강창희姜昌熙:1929(일제강점기)~?, 김달삼金達三 비서, 제주읍 오라리<오라위> 태생, 양진현(29년생, 오라2동 사평마을) 증언 “오라마을은 일제 때 사회주의社會主義 계열로 항일운동을 하던 지사들이 많았다. 허두경은 일본도日本刀를 차고 마을에 나타나곤 했다.”


좌익인사 송삼백은 “정부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는 없다”는 온건파였다. 그는 좌익 활동을 하다 오라리<오라위> ‘연미마을’ 책임자로 강병일에게 인계하였다.


수배령手配令이 내려지기 전 일본日本으로 도피했다. 강창희(19)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47쪽) 2013년 6월 11일, 양진현의 앞집에 사는 김모는 그에게 민애청民愛靑 소년선전부장을 맡기는 바람에 양진현은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고 한다.


김모는 4월 23일 자기 집에서 경찰에 잡혀 연행 도중 마을 인근 ‘동산-물’밭에 이르렀을 때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다 경찰에 사살됐다.


양진현은 어느 날 밤중에 송중평, 송모, 강창희 등과 함께 제주경찰서로 구인했다. 전기 취조만 받지 않고 온갖 고문拷問을 받은 끝에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강창희(19)는 입산入山, 김달삼 비서秘書가 됐다.

 

▲ 이 정헌 선생靜軒先生 수갈운竪碣韻. 문하생들이 정헌 선생 송덕비를 건립할 때 도내 후학 80여 명의 일원으로 강철호姜哲鎬가 참가해 공의 학덕과 선행을 추모하고 칭송한 시이다.

▲강철호姜哲鎬:1860(철종11)~1947(미 군정기), 대정 유림의 영수, 대정향교의 직원. 호는 농은農隱, 본관은 진주, 대정읍 상모리<모실-개>에 살았다. 한말 대정 상무사의 핵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채구석蔡龜錫, 이성교李成喬, 송희수宋希洙, 오대현吳大鉉, 강우백姜遇伯 등과 함께 어울려 대정 유림을 공고하게 다졌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제주성 안의 선비들과 자주 교유했다.


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를 중심으로 하는 제주시 오라리 조설대朝雪臺의 집의계集義契 12동지와 함께 항일구국에 뜻을 두기도 하였다.


1930년 대정면 어업조합의 조합장으로 뽑혀 이사 우영하禹寧夏, 강해진, 허안식, 강범식 등과 힘을 모아 지역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후 영주음사瀛洲吟社 회원으로 시음에 몰입하면서 1936년 대정향교 직원으로 추대되었다.


대정향교의 중심인물 유희춘柳希春, 문봉기文鳳岐, 강일침, 강희진 등을 움직여 대정향교 중수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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