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명당의식은 현실의 고통 넘어서려는 유토피아다”
(67)“명당의식은 현실의 고통 넘어서려는 유토피아다”
  • 제주신보
  • 승인 201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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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설화 2-소목사, 따르던 통인 부친상에 명당 내줘
금기 깨지자 큰 바위와 비둘기 나타나
가치 높아도 당부 지키지 못하면 허사
▲ 1981년 당시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모슬봉 서녑댕이에서 명당을 찾아 떠나는 상여 행렬의 모습. <사진=김유정>

▲풍수지리에 밝았던 소목사


우리 조상들은 이렇듯 명당에 생기가 모여 그 기운이 혈이 되고 그 혈의 기운이 집안에 미쳐 길흉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었다. 이런 풍수사상이 유교의 조상숭배 이념과 만나 오랫동안 흥성했다.


무엇이든 사회적인 선호도가 높을수록 그것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 법이다. 오로지 집안 잘되기를 바라던 시대, 집안 후손 누군가가 개천에서 용 나듯이 자신의 집안을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기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무덤 설화의 대개가 원래 명당이었지만 그것을 조금만 신경 써서 잘 취급했더라면 보다 더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민중의 희구를 드러내고 있다.   


무덤 설화에는 파혈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 주인공으로 소목사가 자주 등장한다. 소목사는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로 재직한 소두산(蘇斗山, 1627~1693)을 말한다.

 

소목사는 풍수지리에 밝았던 제주인 전적 고홍진(高弘進, 1602~1682)을 도안(道眼)이라고 극찬했을 뿐 아니라 그와 교유하면서 제주도 풍수지리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소목사에 얽힌 명당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소목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하자 명당을 둘러보러 다녔다. 평소 소목사는 옛 스승이었던 지(池) 첨사(僉使)의 무덤을 참배 차 찾았다.

 

그의 무덤은 대정고을을 너머 감산리 지경에 있었다. 소목사는 그곳에 이르자 제물(祭物)을 준비하도록 이르고는 그 묘역을 한번 둘러보고 “우리 선생님께서도 이런 자리를 차지하여 묻혔구나”라고 탄복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소목사의 통인(通引) 하나가 놓치지 않고 모두 보고 있었다. 소목사가 스승의 무덤을 참배한 후 산방산 뒤편 도로변에 이르자 일행에게 쉬어가도록 했다.

 

말에서 내린 소목사는 동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한곳을 응시하며 “좋구나. 좋아”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감탄하는 것이었다.


그때 통인은 그런 소목사를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군물이라는 못이 있었는데 소목사가 그 주위를 둘러보면서 혼잣말로 “맹호출림(猛虎出林)!, 좋구나. 좋아.”계속 감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목사의 이런 반응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얼마후 소목사를 따라 다니던 통인이 아버지 상을 당했다. 그 통인이 바로 대정고을 오댁이었다.

 

그 통인은 불현듯 소목사가 감탄하던 땅이 생각나서 염치불구하고 소목사를 찾아갔다. “나으리, 제 아버지 누울 자리를 한번 봐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부탁하니 소목사는 안면이 있는 터라 그 통인의 간청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염치없는 그 통인이 한술 더 떠서 말하는 것이었다. “나으리 지난번에 보아둔 군물머리에 산 한 자리를 소인에게 주시면 백골난망이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소목사는 놀랐다. 자기만 아는 명당의 비밀을 이 통인이 어찌 안다는 말인가. 자신이 찍은 명당을 내준들 아무래도 이 통인이 감당하기에는 무리였지만 하도 그의 소원이 간절해서 소목사는 그만 알았노라 허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소목사는 하나만은 꼭 기억해 두라고 “장례날 개광(開鑛)할 때 그 자리를 네가 꼭 지켜야 한다.” 라고 당부했다.


장례날이 되었다. 통인은 소목사의 당부대로 개광을 계속 긴장하며 지켜보았으나 별 일이 없었다.


그때 매부가 현감이 조문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통인은 감격한 나머지 소목사의 당부를 깜박 잊고 얼떨결에 급히 현감을 마중 나갔지만 현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매부가 현감이 조문 왔다고 했는데 보이지를 않자 장지를 이리 저리 찾아다녔으나 헛것이었다.


그렇게 통인이 현감을 찾는 동안 개광을 하는데 그 속에서 큰 바위가 나왔다. 집안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왕 정해진 자리이므로 무엇이 나왔든 돌 위에 시신을 모실 수 없다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그때까지도 큰 상주인 통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관 시간이 다 돼가자 할 수 없이 바위를 들어내야 했다.

 

순간 바위 아래에서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 명당은 소목사의 당부를 지키지 못해 파혈돼 버렸다.

 

늦게 나타난 통인은 이왕지사 할 수 없다고 판단해 그 바위를 치우고 아버지 관을 내리도록 했다.

 

파낸 바위는 무덤 옆에 세우니 큰 비석과 같았다.

 

그 후 비록 명당이 파혈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 통인의 집안에서는 힘센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벼슬한 사람도 여럿 나왔다고 한다.(서귀포 문화원·2010)

 

▲ 인자수지에 그려진 명당도.

▲명당과 금기(禁忌)


금기는 위반하면 안 되는 것으로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누군가 그것을 어기게 되면 그 사회가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순수한 것, 기존의 유지되는 도덕이나 질서가 오염되기 때문이다. 오염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된다.


아무리 가치가 높은 것이 있다 해도 어떤 금기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허사가 되고 신성함이 사라지고 평범한 것이 된다.

 

명당에 대한 의식은 바로 영예와 물거품 사이에 있다. 명당을 꿈꾸는 것, 인간의 욕망을 현실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가혹하다.

 

명당의식은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려는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거기에는 꼭 금기가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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