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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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차수 수필가

겨울을 잘 지낸 감나무가 새싹을 내밀면 봄은 시작된다.


우리 집은 감나무와 인연이 각별하다. 아이들이 학교입학, 졸업, 결혼, 손녀가 태어났을 때 비어있는 땅에 한그루씩 심어놓은 감나무가 자리를 잡아 작은 숲이 되었고, 나의 쉼터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봄에 감나무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새잎이다. 여린 싹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게 펼쳤을 때 연둣빛 고운 색으로 물든 잎은 그 어떤 꽃과 견주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한여름 더위에 지쳐 몸이 휘청거릴 때면 텃밭으로 나간다. 감나무에 몸을 기댄 체 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청량감을 온몸으로 맡는다. 흙에서 올라오는 서늘함과 나무냄새가 어우러진 곳에 가만히 있다 보면 정신이 맑아져와 편안함을 느낀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 품속처럼. 이 나무를 곁에 두고 살면서 참으로 많은 선물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감꽃이 드문드문 피어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지난해 너무 많은 꽃을 달아 버거웠던 것인가. 꽂진 자리에 숨은 듯이 감이 달렸다. 아쉬운 마음에 나무속에서 허리를 숙인 체 부잣집 마님 금가락지 세듯 열매를 세어보았다. 감이 흉년이로구나. 


어린 감잎이 단단해지면 여름이 가고 가을을 부른다. 이때 나무는 하절기에 키운 열매를 숙성시키느라 이파리는 까칠하지만 알맹이가 곱게 익어간다. 이 풍경도 놓치고 싶지 않은 감나무의 가을 그림이다.


올해는 시월이 되어도 해거리하느라 나무는 간간이 열매를 품고 홀가분하게 서있다. 나무속을 살펴보니 반대쪽 구석으로 몸을 숨겨 뻗어간 큰 가지하나가 휘도록 열매를 달고 있다. 몸이 무거워서인지 열매는 다홍색으로 물들었다.

 

아직 익을 때가 아닌데, 볼이 고운 감을 따자마자 가지가 툭 부러졌다. 겉으론 멀쩡했는데, 가지를 잘라보니 속은 검게 얼룩져 삭아있고 이미 병들어 있었다. 그 힘든 상황에도 맺은 열매를 빨리 익히려고 성급하게 색을 입혔구나. 성치 않은 가지를 지탱하느라 큰 뿌리 잔뿌리 흙속에 사려 담고 둥치에 거북등처럼 갈라진 껍질로 견뎌왔던 나무. 온힘으로 고통을 참으며 서둘러 열매를 숙성시켰다. 식물에게도 이런 모성 본능이 있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면서 문득 손마디에 굳은살이 깊었던 부모님 모습이 어른거린다. 자식열매 맺고 그것 키우느라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도 내색하지 않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어른들. 작은 시름 큰 시름 가슴속에 묻으며 의연하게 지나온 시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내주었다. 단것은 자식 주느라 단맛 잊었고 자식은 단맛 받아먹느라 쓴맛 모르며 살아왔던 세월.


한 생에 부모로 산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그 긴긴 고뇌의 여정을 말없이 걸어왔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명치끝이 젖어온다.


감나무가 가져다주는 결실이 선물에도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텃밭으로 나가 단감 몇 알을 대접하고 돌아갈 때 한 봉지를 건넨다. 인색하던 내가 감나무로 하여금 나눔의 실천을 배우도록 일깨워주고 있다. 감꽃을 줍는 일은 먼 유년이 추억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 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이 나를 기쁘게 살도록 한다.


달달한 맛을 아낌없이 내준 나무는 버틸 만큼 버티다가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면 맨 위에서부터 한 잎 한 잎 시나브로 떨어진다. 잎은 두꺼워서 땅에 떨어지면 좋은 거름이 되니 이런 자연이 친구도 드물 것이다. 


감잎 하나에도 사계절의 온갖 풍상을 겪은 삶의 이력이 담겨져 있다. 까치밥 몇 알을 달고 빈 몸으로 겨울을 나려하는 감나무가 도인같이 서있다. 감나무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내년 봄이 오면 새잎으로 꽃으로 열매로 다시 태어날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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