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리땡
빨간 고리땡
  • 제주신보
  • 승인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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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1960년대 후반, 집안의 맏이였던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를 했다.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야했던 아버지와 엄마는 도시에서 기반을 잡을 때까지 국민학교 3학년인 나를 할머니에게 맡겼다. 할머니는 당신의 아들인 나의 막내삼촌과 손녀인 나를 혼자서 돌보게 됐다. 막내삼촌과 난 고작 2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시골에 남아 의지할 곳이라곤 할머니밖에 없었던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은 마음에 늘 삼촌보다 먼저 할머니 손을 잡았다. 밤에도 나는 할머니 곁에서 잠이 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포근하게 보듬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할머니는 꼬깃꼬깃 모아놓은 쌈짓돈으로 나에게 빨간 고리땡(코르덴) 옷 한 벌을 사주셨다. 설을 앞두고 십리 길을 걸어 장에 가서 설빔을 사 오신 것이다. 나는 기쁨에 겨워 빨간 고리땡 옷 위에 모자 달린 나일론 잠바, 귀마개, 털신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꽁꽁 언 논에서 신나게 썰매를 탔다. 할머니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국민학교 5학년, 나는 드디어 엄마가 있는 도시로 가게 됐다. 읍내까지 배웅을 나온 할머니와 쪽파에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린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엄마와 난 도시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를 태운 버스는 내가 탄 버스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버스는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 곧 사라져갔다. 갑작스런 단절의 공허함이 밀려왔다.

도시는 낯설었다. 한껏 차려입고 새로운 학교에 갔지만 난 여전히 시골에서 온 촌스런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성적순으로 앉을 자리를 정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전학 온 나를 맨 마지막 분단에 앉혔다. 어색한 도시의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 준비를 하다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그때 시골에서 본 자연의 색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색깔보다 훨씬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거친 초야(草野)에 피어난 진달래와 패랭이꽃, 솜털로 둘러싸인 할미꽃, 땅에서 익어가는 참외의 노란 빛깔 등은 어린 시절 나에게 꿈을 심어 준 동무들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는 비로소 당신의 아들보다 손녀인 나를 더 아껴주었던 할머니의 속 깊은 사랑을 알게 됐다. 삼촌에 대한 미안한 마음 너머로 할머니의 따뜻한 정(情)이 그리웠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몇 년이 흘렀던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불현듯 꿈에 나타났다. 화사한 옷차림에 양산을 쓴 할머니 머리 위로 반짝이는 보석처럼 햇살이 흩어져 내렸다. 할머니는 나를 향해 누군가에게 줄 선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할머니의 부탁 말씀에 나는 서둘러 선물을 사러가다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너무 꿈이 생생해 아침이 되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간밤의 꿈 얘기를 했다. 엄마는 바로 내일이 할아버지 제사라며 “아무래도 이번 제사상에는 네가 뭔가 하나 정성들여 올려야겠다.”고 했다. 엄마의 말대로 할아버지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나니, 왠지 할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은 생각에 다소 마음의 위안이 됐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족해졌고, 문명의 혜택을 받아 사람들은 더욱 편리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문명의 진보와 더불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疎遠)해진 것이 사실이다.

갈수록 점점 더 삭막해져가는 세상을 살다보니 ‘빨간 고리땡’으로 상징되는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더욱 그리워진다. 설을 앞두고 ‘빨간 고리땡’이란 말만 들어도 줄줄이 사탕처럼 딸려 나오는 할머니와 고향 생각에 내 마음은 어느새 포근한 시골의 빙판 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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