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잃어버린 마을엔 텅 빈 돌담만…망자의 원혼이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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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잡이 하던 해변 인근 소규모 마을
주민은 군 습격에 집 불 타고 총살까지
“거리마다 우는 사람 천지…처참"
현재 주택단지 조성되며 다시 ‘활기’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의 돌담들이 마치 제주의 전통 묘지인 산담처럼 구획을 나누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봉분과 비석은 없다. 그저 텅 빈 공간만 있을 뿐이다. 주인 없는 돌담들은 그저 말없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고 있었다. 지난 17일 오후 4시께 제주시 화북동 별도봉 인근에 있는 곤을동을 찾았다. 이곳은 4·3 당시 하루아침에 폐허가 돼버린 마을 터다.

4·3 이전에는 화북천 두 지류를 따라 서쪽에는 ‘안곤을’이, 동쪽에는 ‘밧(밖)곤을’이 있었다. 각각 22가구, 28가구가 살았다. 두 지류 사이에는 ‘가운데곤을’이 있었고, 17가구가 살았다. 지금은 별도봉 바로 아래에 있는 안곤을에만 당시 집터와 아궁이로 사용했던 흔적,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가 남아 있다. 나머지 가운데곤을과 밧곤을에는 주택단지와 밭이 들어서 있다.

 

▲ 4·3 당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됐던 안곤을의 모습. 현재 당시 집터와 아궁이로 사용했던 흔적과 올레가 일부 남아 있다. 4·3 당시 마을어장인 멸치어장도 함께 사라졌다.

 

■ 빈촌(貧村)에 찾아온 비극


곤을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바다와 인접해 있고, 화북천 지류 인근에 마을이 있다 보니 비가 많이 오는 때면 늘 침수 피해를 겪었다. 또 해안변이라 땅도 척박해 농사 짓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보니 화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었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부지런히 인근 해안에 밀려온 해초 등을 거름으로 만들어 밭에 뿌려 쌀보리를 중심으로 콩, 고구마, 팥, 메밀 등을 경작하며 살았다. 또 바다와 맞닿은 동네의 특성상 안곤을과 별도봉 벼랑 쪽에는 마을 공동어장인 멸치어장을 일구기도 했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테우(제주전통 뗏목)를 타고 후릿그물을 바다에 드리웠다가 멸치가 그물 안으로 들어오면 그물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멸치를 잡았다. 그럴 때면 먼 바다까지 멜(멸치) 후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평화로운 이 마을에 비극이 찾아왔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께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마을을 포위했다. 군인들은 안곤을과 가운데곤을의 집집마다 불을 붙이며 주민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젊은 사람 10여명을 안곤을 바로 앞 바닷가로 끌고 가 총살했다. 이날 김봉두(22), 이완성(33) 등 젊은 사람이 주로 희생됐지만, 김관근(48), 문태오(50) 등 나이든 사람들도 희생됐다. 또 살아남은 젊은 남자 10여명을 화북지서로 끌고 가 하룻밤을 지새우게 한 뒤, 다음날인 5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대 밑 ‘모살불’(현재 화북등대) 해안에서 총살했다. 이후 군인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밧곤을 28가구도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이로써 오랜 세월 삶을 영위해오던 67호의 적지 않던 마을이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사라졌다. 


지난 15일 제주시 화북동 자택에서 만난 양옥자씨(85·여)는 그날의 비극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16살이었던 양씨는 초토화됐던 곤을 마을이 아닌 화북 시내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 친한 사람이 곤을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집을 불태우니깐 살 곳이 없다고 우리 집에 당분간 묵기로 한 거라. 그래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그 아버지 친구 분 짐 가지러 곤을 마을에 다녀오는데 거리마다 길바닥에 앉아서 우는 사람이 천지라. 이불만 달랑 내놓고. 그때 처참했어. 그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곤을 마을 사람들은 인근 ‘새 곤을’(현재 화북1동 4047번지 일대)로 이주해 움막 등을 지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다. 

 

 

▲ 김용두 할아버지(사진 왼쪽)와 양옥자 할머니가 지난 4·3 당시 초토화됐던 곤을동 마을에 대한 아픈 기억을 증언했다.

■ 가난한 우리는 희생양이었다


안곤을에 살다가 변을 당했던 김용두씨(89)는 현재 새 곤을에서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당시 마을에 없었던 김씨는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큰형, 첫 번째 부인을 잃었다. 이후 양옥자씨를 만나 재혼했다. 그는 양씨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날 군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어. 마을 사람들이 잘못한 일이라도 있어서 그런 변을 당하면 억울하지도 않지. 내 생각에는 (1948년) 4·3 이후 큰가름(화북 시내) 빈집 등에 숨어있던 무장대들이 세력이 약화되면서 일부가 곤을 마을 인근 별도봉으로 숨어 들었어. 거기가 산세가 험해서 숨기 좋았거든. 군인들이 그걸 알고 바로 옆 우리 마을을 포위 해다가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인 거지. 무장대를 제대로 색출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젊은 사람이면 빨갱이라고 해서 그냥 죽였어. 개중엔 나이든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 안 되지. 우린 이념도 뭐고 몰랐는데 뭐 잘못했다고. 참…. 그냥 화북에서 제일 가난하고, 힘없으니깐 본보기로 그런 거야.”   

 

 

▲ 곤을동 입구에 세워진 4·3유적지 조감도의 모습. 17일 현재 절반가량이 뜯어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 이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그날의 비극 이후 마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도 변해갔다. 밧곤을에는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가운뎃곤을도 양옥집 한 채만 있었지만, 최근에는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별도봉과 붙어있는 안곤을만 비교적 불에 타버린 마을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최근 변화하고 있다. 2000년까지는 마을 가운데 연자방아도 남아 있었으나 현재 누가 가져갔는지 사라져버렸다. 안곤을을 둘러 돌던 마을의 좁은 길은 화북천 확장으로 일부가 무너졌고, 별도봉 산책로를 마을 안까지 연결하는 공사를 하면서 마을 원형이 일부 파괴되기도 했다. 또 마을어장인 멸치어장이 사라진 대신, 인근에는 수시로 큰 배가 오가는 제주항이 들어섰다. 


‘잃어버린’ 마을에 새로운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과거의 비극은 점차 희미해지고 다시금 활기를 띠고 있다. 다만 마을 한복판에 세워진 표석만큼은 그날의 비극을 우리에게 무겁게 전하고 있다.

 

‘초가집 굴묵(굴뚝) 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는 간데없고 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도는 구나! 별도봉을 휘감아 도는 바닷바람 소리가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산 자에게는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 가신 님들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빌면서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곤을 마을을 떠나며 멀리서 제주항으로 들어오는 여객선의 뱃고동 소리가 조종(弔鐘)을 울리듯 길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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