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를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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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미 수필가

바흐를 듣는다. 무반주 모음곡 1번 프렐류드를 카살스의 연주로 선택한다. G.Major의 평화롭고 균형적인 선율이 낯설지 않아 편안하다.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시간이 흐르는 걸 감지하지 못하듯 음악에 홀릭된다.


눈을 감고 음을 따라간다. 16분음표의 음들이 줄줄이 이어서 흐른다. 무반주의 첼로 소리는 고독하지만 한 음 한 음 어울려 화음을 이루고, 첫 음의 깊은 울림은 스르르 스며들어 가슴 한켠을 메워준다. 막힘없이 흐르는 선율은 어느 순간 고조되어 도도하고, 숨 가뿐 질주를 하다 가슴이 탁 트이는 명징한 소리로 끝마친다.

 

모두 떠난 이 겨울, 황량한 세상을 채워주는 신의 은총인가, 시작도 끝도 없이 눈이 내린다. 사진 속 장면처럼 정지된 세상과 마주한 나, 그 옛날 은수자처럼 침묵이다.


얼마나 위로받고 싶은 나날이었는가. 벼랑 끝까지 밀어버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애써 지우려 최면을 걸듯 들었던 바흐. 흐르는 음악의 자유로움과 섞이어 나를 보듬을 수 있지 않았는가. 노련한 술수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처절함. 삶의 부조화는 어디에든 있는 법이지만, 진실은 오도된 채 나를 짓밟아 버려 피 울음을 몇 날을 울었는가.


질투가 근원이다. 한 사람의 이간질은 몇몇 사람을 포섭하여 나를 섬처럼 고립시켰다. 이 억울함을 누가 풀어주리오. 신께 기도만 드린다. 혼자서 견디는 나날, 나는 바흐를 꼭 부여잡았다.


홀로 간다는 것이 때론 동화되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겉돌게만 된다. 새들도 무리 지어 날아가거늘, 음악이 흐르듯 흘러가려 하지만 나만의 틀 속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다. 때론 페이스를 잃어버린 마라토너처럼 풀썩 주저앉고 싶은 날, 바흐의 음악을 듣는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카살스의 연주에 몰입되어 내 안의 소음도 추함도 잠재워진다. 휑한 가슴이 충전되어 샹그릴라다. 세상과의 불협화음도 음악처럼 조화로울 수 있으리라.

 

바흐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신께 바치는 그의 연주는 넘치도록 채우고 채워서 정성을 다한 만큼 신은 최고의 연주로 응답해 주었고, 그의 일상은 오르간의 향연으로 구원을 받는다.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오페라를 단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던 가난한 바흐. 그의 삶은 오직 예배에 바쳐질 곡들을 만들고 신께 영광을 드리는 깊은 신앙의 외길이다. 신이 주는 영감으로 작곡을 하고 신과의 합일을 이루는 그의 삶도 영광이었으리라.


작곡 공부를 위해 대가들의 악보를 달빛에 비추어 그려내는 작업을 하며 그는 시력을 잃어버린다. 바흐의 음악을 듣노라면 완벽한 오선지 위에 비극의 잔영이 언뜻언뜻 들려오는 것은 나만의 비약일까.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은 “첼로의 구약성서”로 솔로 연주를 위한 곡이다. 13세의 소년 카살스가 독일의 고서점에서 먼지 속의 낡은 악보를 발견한다. 원본도 없이 바흐의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의 필사본이다. 200년 동안 연습곡으로만 쓰였던 이 남루한 곡을 카살스는 13년동안의 갖은 노력으로 단장을 시키고 솔로 연주곡으로 당당히 외출을 시킨다.


모음곡중 1번 퓨렐류드는 내 졸업 연주곡이다. 반주 없이 흐르는 저음의 질박한 첼로 소리가 서서히 나를 붙든다. 나는 숙명처럼 바흐에게 빠져 인생을 연주한다.


첼로를 품는다. 내 심장 박동 소리를 다 듣는 첼로. 거친 보잉에도 헛손질에도 묵묵히 넓은 울림통을 깊게 울려 준다.


허허로운 날, 첼로를 껴안고 활을 잡고 현을 그으면 그윽한 소리가 내 호흡을 고르게 하고, 그 소리에 취해서 소용돌이치던 마음은 고요하다.

 

얼어붙어 완고한 겨울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거센 바람도 나뭇가지 사이로 비켜 앉아서 나직이 떨고 있고 새들도 화들짝 비상을 한다.


아! 이제 나도 날아보자. 다시 활을 지그시 그어 보는데 저음의 현이 떨리는 몸짓으로 다가오고 악보 위에 낮은 음자리표들이 꽃잎처럼 화사하다. 현을 짚어내는 손가락도 눈처럼 나풀대고 나는 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우아해진다. 이제 평정이다. 신께서 허락하신 충만한 시간, 더는 무엇이 필요하랴.

 

카살스의 연주로 다시 바흐를 듣는다. 나를 일으켜 준 바흐, 영원히 품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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