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피는 동양의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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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순, 수필가

매주 목요일은 도서관의 그윽한 묵향 속에 서예를 학습하는 날이다. 도서관은 많은 장서 속에 묻혀 독서만 하는 공간으로 알지만, 제주도서관은 여느 도서관과는 다르다. 문학, 문화예술인들의 학습강좌는 물론 세미나, 서예까지 할 수 있는 다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다목적 문화 공간이 있어서이다. 제주도 최초의 도서관이라는 역사적 전통을 간직한 개방적 지역 사회 도서관이다.

나는 서예학습 동아리에 가입한 후, 정해진 날짜에 긴장하거나 부담감 없이 면학의 산실 도서관으로 간다. 도서관에 모인 사람들은 남녀노소의 차이는 있지만 서예라는 취미를 가진 이 지역 사회의 동호인들이다. 이곳에서는 문방사우 묵객(墨客)들이 글자 한 획, 한 획 정성들여 그어 내려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중하고 진지하다. 상하관계 없이 동등하고 정겨운 반가움의 존재들이다. 서예 목적이 탐구, 정신수양, 대전입상, 존재감의 표현 등 각자 다르기는 하겠지만, 서예가 좋아서 배우는 공통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인 소중한 인연의 결집체이다.

서예는 한자의 해서, 행서, 초서와 한글의 판본체, 궁체, 문인화로 대별된다. 궁체는 정자체와 반흘림체, 진흘림체 등인데 서체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또한 서예는 학문의 영역임과 동시에 예술의 영역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전승되는 문학이나, 체육, 음악 등과는 달리 은은한 묵향 속에 써내려가는 붓글씨는, 서양과는 다른 동양정신의 표현이며 동양 문화의 멋이다.

나는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쉬고 있어 무엇을 해보고 싶기는 한데 마땅한 일이 없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무직자로 밋밋한 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이다. 취미 생활인 낚시가 유일한 즐거움이고 손자를 학원에 보내고 돌보는 것이 일상적인 일과이다.

삶에 보람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씩 즐기는 낚시가 좋기는 하지만 보람되는 사고 축적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앞으로 할 일은 적성에 맞는 취미를 갖고 즐기는 일, 문학과 서예라고 결론지었다. 문학동아리 활동은 퇴직 전부터 지속하고 있으나 서예는 좀 번거로워 오랫동안 망설였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차에 마침 주위의 권유가 있어 늦깎이 서예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유년기와 청소년시절엔 소설을 비롯하여 책을 많이 읽었다. 붓글씨도 좀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서예에 몰두하지 못했다. 과거 취미에 그치면서 붓을 멀리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퇴직하면 다시 시작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게으르고 의지가 약한 탓이었다.

이제 매주 목요일에 제주도서관에서 훌륭한 선생님의 지도로 서예를 학습하고 있다. 지난 시절을 생각하며 조금 더 일찍 시작했어야 하는 후회도 있으나, 후회는 결과에 앞서지 않는 법, 시작이 반이라고 애써 자위한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서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습에는 정년이 없음을 새삼 느낀다. 필력에 능통해진 선배들의 글 솜씨를 보면 내 자신이 작아지지만, 열심히 하면 나도 가능하리라 되뇌며 굳건한 의지를 다진다.

정적인 분위기에 조용한 심성을 가진 대부분의 동호인들이 반갑다. 삶의 방식과 빈부의 격차를 떠나, 조용한 곳에서 편안하게 학습할 수 있는 시간들이 보람되고 즐겁다. 만학의 길, 끝없는 학습을 위해 도서관으로 가는 나에게 “잘 다녀옵서” 라며 배웅하는 아내의 얼굴엔 엷지만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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