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석상이 들고 있는 ‘지물’…당시 역사도 함께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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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든 동자석-예를 갖춘 모습의 문인석
한국 유교 가르침의 영향…자손 보살필 것이라 믿어
예수 상징하는 십자가 기물…제주 신앙 전파 상황 대변
▲ 동자석이 손에 들고 있는 기물들을 그린 그림. 십자가, 숟가락, 부채, 술잔 등 다양한 기물들이 보인다.

▲문화적 상징


제주도의 석상(石像) 중에 문인석과 동자석이 있다.


이 석상이 손에 든 물건들을 일컬어 지물(持物)이라고 한다. 불교적 색채가 짙은 말이다. 도상해석학(iconology)적 의미로 보면, 지물은 생활 세계의 도구인 기물(器物)이기도 하고, 뱀, 새처럼 자연물일 수도 있다.


이런 지물은 국가, 민족, 지역마다 다르고, 또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문화적·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도상해석학은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는 역사 방법론으로써 먼저 석상이 든 기물이나 자연물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대상적 의미),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고 무엇에 사용되는 것인지(주제적 의미), 이것이 다른 의미(역사, 관습, 종교, 사회)들과 시대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가(다중적 의미), 그리고 어떻게, 왜 그렇게 표현했으며 그것의 문화적 징후와 역사적인 가치(표현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홀(笏)을 들고 있는 것은 존엄성을,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 것은 기백을 나타낸다.


문인석과 동자석을 관찰해 보면, 포괄적으로 문화적 상징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양하는 동자석인 경우, 유교에서는 “조상에게 기도하고 제사 지낼 때, 귀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도 예가 아니면 정성스럽지 못하고 엄숙하지 못하다”라고 하여 예를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곡례(曲禮’에 기물(器物)을 받들 때에 “무릇 물건을 받들 때에는 손을 올려서 가슴에 대고 받들며, 손에 내려 들 때도 팔을 허리에 대고 든다.

 

그리고 천자의 기물을 잡을 때는 가슴 위로 잡고, 제후의 기물을 잡을 때는 가슴에 평형(平衡)되게 하고, 대부의 기물을 잡을 때는 가슴에서 내려오며, 선비(士)의 기물을 잡을 때는 늘어뜨리듯이 든다.” 라고 하여 모름지기 윗사람께 예를 대하는 방법을 중요시 여겼다.


무덤에 세우는 석상들이 모두 예를 갖추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런 유교의 가르침의 영향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제사의 참뜻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미처 다하지 못한 봉양을 뒤쫓아서 하고, 아직 다하지 못한 효도를 이어가는 것’이라면, 문인석이나 동자석을 세우는 이치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데는 삼도(三道)가 있다. 삼도란 첫째,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봉양하고, 둘째, 돌아가셨을 때는 상복(喪服)을 입고, 셋째, 상(喪)이 끝나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께 봉양할 때는 도리를 잘 따르는지를 보는 것이고, 상(喪)을 당한 때는 그 슬픔이 진심인지를 가리고.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공경한지를 따지는 것이다.


무덤에 세우는 문인석과 동자석이 모두 받들 듯이 공경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죽게 되면 산사람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가 됨과 동시에, 조상(실존)이 초상(귀신)이 되어 자손을 보살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문인석과 동자석이 모두 두 손으로 정성껏 가슴 위로 기물을 받들 듯이 잡는 것은 바로 이 삼도(三道)의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주도 동자석에는 유교의 예사상과 더불어 무속, 도교, 불교, 천주교의 영향도 보인다.
특히 천주교나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든 동자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십자가를 든 동자석. 1939년에 만들어졌다.

▲십자가를 든 동자석


1997년 겨울 나는 어느 오름의 동자석을 조사하다가 십자가를 든 동자석이 있는 무덤을 찾았다.


이 십자가는 문화적 상징으로 보면 예수의 상징 기물이다. 조면암 비석에 묘지명은 議官高公之墓. 석물을 세운 연대가 ‘昭和 十五年…謹誌’라는 것으로 보아 1939년에 동자석이 만들어졌다.


야무진 얼굴에 다소곳이 십자가를 들고 선 모습이 매우 진지하다.

 

소동고랑한(타원형) 얼굴에 음각으로 새긴 삼각형 모양의 눈, 높지 않은 긴 코, 일자형의 입을 하고 있는 현무암 동자석이었다.


십자가(十字架, cross)는 예수의 수난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기물이다. 이 십자가는 예수의 구원 행위와 그 모든 신성한 능력을 뜻하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며 겪는 삶의 시련들을 이겨낼 힘을 준다고 믿고 있다.


제주도의 천주교 전파는 1898년 4월 목포에서 세례를 받은 제주도 대정군(大靜郡) 출신 양(梁) 베드로에 의해서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申) 아오스딩과 신(申) 바오로 형제, 김(金) 생원(生員), 강(姜) 도비아를 입교시키고, 정의군(旌義郡)과 제주군(濟州郡)으로 천주교를 전파했다.


 1899년 페이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제주읍에 성당을 마련한 이듬해, 페이네 신부는 떠나고 후임으로 라크루 구(Lacrouts, 具瑪瑟) 신부가, 1901년 5월에 뭇세 문(Moussett, 文濟萬) 신부가 바다를 건너왔다.


1901년 봄까지 제주도민 242명이 세례를 받았고, 700여 명이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 체류하는 몇몇 일본인을 제외하면 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섬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01년 이재수의 신축 민중 항쟁이 일어나자 희생된 천주교인은 500~600명이나 되었다.


최초로 조선의 제주도에 온 기독교인은 하멜이라고 한다. 하멜은 최초로 조선에 포도주를 가지고 온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 후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 9월 17일 미국 남·북 장로교 선교회, 호주 선교회, 캐나다 선교회 등 4교파 선교회의 공의회 결정에 의거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했다.


이 독노회와 관련이 있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중 한 명이 바로 이기풍 목사이다.


한국장로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풍토가 전혀 다른 외지에 제주도 초대 선교사로 이기풍 목사가 임명된 것은 그가 스스로 자원했기 때문이다.


1908년 이기풍 목사는 아내와 조사 한 사람만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 경성에 도착, 다시 인천에서 목조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이기풍 목사는 동행을 남겨두고  제주도 가는 길에 배가 난파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헤엄쳐 추자도에 상륙하여 목숨을 구했고 제주도에서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1908년 초여름쯤 그는 제주도 최초의 신자 김재원(金在元)을 만났고, 두 사람의 전도에 의해 다시 조봉호(趙鳳鎬)와 이도종(李道宗)에게 복음을 전했다. 후에 이도종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김제에서 안수를 받아 제주출신으로 첫 목사가 되었다.<제주도지·2006> 


 이도종 목사는 1929년 제주도에 돌아와 한경면 고산리에 살면서 대정읍 인성 교회와 안덕면 화순 교회에 담임목사로 있었는데, 1948년 4·3사건이 나자 그 해 6월 16일 목회 가는 길에  안타깝게도 무릉 2리 고린 다리에서 무장대에 의해서 희생되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제주도의 천주교나 기독교 전파 과정의 영향을 받은 신자의 무덤 석상인 것이며, 석상의 지물(持物)은 그것이 지시하는 문화적 상징으로써 당시 제주도의 신앙 전파의 사회적 상황을 대변하는 지표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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