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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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당선자

둥치 굵은 나무가 쓰러졌다. 등산로 한편에 가로뉘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방제를 위해 베어지거나, 태풍에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휑하게 비어버린 숲, 내리쬐는 햇살이 땅 속 줄기를 뻗어 생을 길어 올리던 뿌리의 노고를 떠올리게 한다.

 

시아버지는 양복을 즐겨 입었다. 일터에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물건을 사러 갈 때, 손자들을 보려고 아들 집을 찾을 때에도 조끼까지 온전히 갖춰 입었다. 더운 여름 오일장에 갈 때도 정장을 하고 나갔다.


남편 손에 이끌려 맨 처음 인사를 갔을 때 시아버지 모습이 기억난다. 시아버지는 더블자켓, 넥타이와 와이셔츠 차림에 멜빵을 하고 잎이 무성한 후박나무처럼 앉아 있었다. 나에게 본이 어디냐고 물었다. 당신과 고향이 같은 외삼촌 이야기를 할 때 “좋다!”라고 짧게 대답하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시아버지는 젊은 날의 대부분을 홀로 일본에서 보냈다. 당신의 아들 친구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 특유의 반듯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내가 둘 째를 출산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에도 아버지는 넥타이와 와이셔츠 차림으로 직접 장에서 사온 산모용 국거리 생선을 손질하고 있었다.

 

“또 딸을 낳았다고 섭섭해 하는 눈치를 보이지 마라.”

시아버지가 식구들에게 당부했다.


“시부모가 힘이 빠졌을 때, 너도 네 시아버지가 너에게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친정어머니가 미역국을 내오면서 나에게만 따로 말하였다.

 

찬바람 불던 어느 겨울 날, 시아버지가 쓰려졌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가족들이 모여살기 좋은 우리 집으로 옮겨 왔다. 한동안 가족들이 중심을 찾느라 출렁였고 뿌리를 드러낸 지 삼 년 만에 시아버지는 고목이 됐다.

 

친정아버지는 백일홍나무를 닮았다. 겉모습은 왜소하고 표현을 잘 하지 않았지만 잔잔한 마음 씀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친정을 찾을 때마다 말없이 창고와 텃밭을 둘러보고, 냉동실에 얼려둔 어머니의 물천까지 찾아내 손수 찬거리들을 챙겨주었다.


독감 한 번 앓는 것을 본 적이 없어 건강한 줄 알았는데, 이른 나이에 서둘러서 우리 곁을 떠났다. 시아버지보다 십여 년 앞서갔다. 당신의 삶 어느 부분이 못내 아쉬웠는지, 그렇게 술에 의지해야만 살 수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친정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학사모와 대학노트를 발견했다. 노트에는 아버지의 윤기 흐르는 젊음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신입생들 앞에서 교수님이 들려줬다던, ‘여러분은 3억분의 1 확률로 만난, 이세상의 단 하나뿐인 기적과도 같은 존재입니다.’라는 말을 큰 따옴표까지 찍어가며 써놓고 있었다.


차남인 아버지는 집안을 위해 짊어져야 하는 짐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육지에 있는 대학에 가기를 원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하냐고 친척들이 반대하고 할머니는 눈물바람을 하였다. 절망감에 3일을 굶고 골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밭갈쇠를 팔아주어 입학금을 낼 수 있었던 아버지, 다시 제주에 돌아와 평생 농사꾼으로 눌러 살았다.


남편과 아들에게도 내게는 익숙한 뿌리의 문양이 있다. 남편은 청바지를 입을 때도 멜빵을 메고, 양복을 입을 때는 조끼를 갖춰 입는다. 무슨 옷을 그렇게 두서없이 입느냐고 타박을 주면 비시시 웃고 마는 남편. 지금의 남편 모습에서 처음 뵐 무렵의 시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바로 태어난 아들의 군사 우편에도 친정아버지의 노트에서 보았던 필체와 닮은 글씨가 들어있다.

 

하늘을 향한 나무의 뿌리를 들여다본다. 나무는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꽤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다. 축축한 이끼가 돋아나고 벌써 수피가 부드럽게 바스라진다. 나무의 껍질을 가만히 들춰내자, 작은 벌레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인다. 나무는 커다란 뿌리에 크고 작은 흙덩이와 자갈들을 매달고 또다시 수많은 생명을 가솔처럼 키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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