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선조의 혼 담긴 조각…망자 곁 지키며 악귀를 물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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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앞에서 칼을 쥔 문인석…묘주에 대한 수호적 의미
조선시대 칼은 여성에겐 ‘정절’ 남성에겐 ‘충성’ 상징
‘삼멩두’ 중 하나인 신칼은 무속과 연관…점 칠때 쓰기도

■추회(追懷)

 

제주도 동자석과 문인석을 찾아다닌 지, 어느새 20여 년이 넘었다.


동자석 지표조사표가 필자의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고 있어 감개가 무량하다고나 할까.


지금도 필자는 여전히 무덤 석상을 연구하고 있지만 가끔 안하무인격으로 어처구니없는 글을 쓰는 이를 볼 때마다 ‘진정 학문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적 행위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거듭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기관의 2017년 석상 관련 글은 해당 발표자의 양심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금까지 제주 동자석에 대한 실체 규명이나 현존하는 석상들의 상태나 가치 등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저조한 형편이다. 또한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필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일부 잘못된 추측이나 주장들이 여과 없이 여러 논문에 그대로 인용되어 답습되는가 하면…등등”이라는 글을 보면, 마치 지금까지 제주도 동자석 연구가 형편없다고 주장하며 자신만이 그것을 다 해결한 양 의기양양하고 있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이런 류의 글이 나오려면 당연히 필자의 2001년 제주도 문예회관 제1전시실에서 열린 <아름다운 제주석상 동자석> 다큐멘터리 전과 같은 제명으로 2003년에 쓴 ‘아름다운 제주석상 동자석’이라는 책, 동자석에 대한 다양한 문화지의 여러 글과 신문 연재 및 기고문들, 그리고 2012년 부산대 석사학위논문인 ‘제주도 동자석 연구’가 있는 줄을 몰랐을 것이다.


유독 필자의 글들만 참고 문헌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석상 연구가 저조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어디선가 보고 있기는 하는 모양이다.


특히 이모씨는 ‘아름다운 제주석상 동자석’을 2003년 사진 찍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학생문화원 전시실에서 전시한다며 책을 구하기에, 그곳에서 만나 필자가 사인까지 해준 적이 있다.


사람의 자기중심의 왜곡도 무섭다. 그러나 자신이 남긴 글은 참으로 더 무섭다.


한 번 기록된 글은 두고두고 자신을 따라다닌다. 글은 글쓴이의 수준이며, 인격이 보이고 책임이 따른다.


문장 구조, 용어 선택, 글의 구성, 개념 정리, 표절어, 도상 등 막 쓰는 것이 글이 아니다.


글은 사람마다 즐겨 쓰는 용어가 있고 문장을 보면 알게 된다. 언젠가 기회가 만들어지면 시민 대중을 위해 이 씨의 글에 대한 메타 비평의 기회를 가질 생각이다.

 

▲ 칼을 든 문인석의 모습. 칼을 쥔 석상은 제주에서 매우 희귀하다.

▲칼을 든 문인석


문인석이 칼을 들고 있다면 무슨 의미일까. 사모를 쓴 문인이 오른손에 환도(還刀)를 들고 있다고 해서 무인석이라고 할 수 없다.


무덤 앞에서 칼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묘주에 대한 수호적 의미다.


이것은 왕릉의 무인석(장군석)의 영향이겠으나 문인석 복장에 환도를 들고 있는 것은 제주 석공의 임의적 해석에 다름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긴 외날의 검을 환도라고 했다.


환도는 하는데 호신용 또는 전투용 병기이다.


우리나라에서 환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렬왕 3년(1277)에 원나라 사신 유홍홀로(劉弘忽奴)가 오자 왕이 이장무(李藏茂)를 보내 충주에 보내서 환도 1천 자루를 만들어 바친 기록이 있다.


당나라의 검은 직선형이었으나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게 된 이후,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사브르(sabre)라는 곡선의 칼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임금님의 호위무사가 사용하는 운검(雲劍)도 장식만 다를 뿐 이 환도의 일종이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와 왔던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기록에는 당시 고려 성문을 지키는 칼 찬 무사의 모습이 선연하다.


“문을 지키는 장교들은 모두 칼을 찼는데, 생긴 게 길고 날이 예리하다. 칼자루는 백금과 검은 쇠뿔로 상감하고 물고기 가죽으로 칼집을 만들었으며 옥 등으로 장식했다. 이는 옛 제도의 유습이다.”라고 했다.


조선 초기 환도의 길이는 각기 달라서 규격을 정했는데 영조척(營造尺)으로 보병용은 약 73.6cm, 기병용은 65.6cm로 정했다.


칼 길이가 짧은 것은 당시 적들은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베는 것보다 찌르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지만 임진왜란 이전부터 칼의 길이가 너무 짧다는 여론이 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는 과정에서 왜인들의 일본도에 비해 너무 짧다는 결론이 났고, 임란 이후 조선 후기가 되면 환도의 길이가 길어지게 된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기록된 환도의 길이는 90cm가 넘는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오면 조총이나 궁수 위주의 무기와 용병술이 달라져 환도의 길이는 다시 50cm 정도로 짧아져 의장용으로 변하게 되었다. <민승기·2004>


칼의 상징적 의미들은 다양하다.


조선시대에는 칼은 여성 정절의 상징으로 장도(粧刀)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또 남성에게 칼의 의미는 충성을 나타내었다.


성년이 되면 관례를 치르고는 패도(佩刀)를 받거나 전쟁에 나가는 장수에게 임금이 충성 서약의 징표로 검을 하사하기도 했다.      

 

▲ 신칼을 든 동자석의 모습.

▲신칼을 든 동자석


동자석이 오른손에 신칼을 들고 있다면 당연히 무속과 연관이 있다.


동자석이 신칼을 들고 있는 것은 악귀를 물리치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다.


신칼은 의례용 칼로 무속의 기물인 삼멩두 중 하나에 속하며 삼멩도라고도 한다.


삼멩두는 심방의 굿할 때 사용하는 신칼, 요랑(요령), 산판을 말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심방집에 신단을 만들어 신으로 모셔둔다.


여기의 신칼은 명도칼이라고도 하는데 명도, 신명도, 대번지 등으로도 불린다.


신칼은 악귀를 쫓거나 점을 치는데 사용한다.


진성기 선생은 ‘곱가름’이라는 제차를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귀신들렸다고 하여 몸속에 육신과 귀신을 곱갈라야(구분짓는 것) 한다고 한다.


병에 걸리는 것은 죽은 이의 영혼이 제 갈 곳으로 못가고 이승과 저승사이를 떠돌다가 허한 사람의 몸에 침입하게 되면 이때 심방의 그 귀신 혹은 죽산이(잡귀의 일종)를 붙들어 매어 신칼을 들고 애원하기도 하고 위협하며 귀신을 퇴치하는 것이다.


또 이 신칼은 점을 칠 때는 두 개의 칼의 모양을 보고 길흉을 말하기도 한다.


새도리(최악의 불길), 칼선도리(아주 불길), 애산도리(이별의 슬픔), 등진도리(이별·불화), 왼조부도리(길조), 노단 조부도리)최고 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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