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한국을 세 번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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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필, 전 美버지니아주 한인회 회장
미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자주독립, 1950년 한국전쟁 참전, 1966년엔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한국의 수출품을 쿼터제 없이 미국시장에 완전 개방하는 정책을 폈다다.

먼저 미국은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 4년 동안 계속된 일본과의 전쟁은 미국이 승리함으로써 한국의 해방과 자주독립을 다시 찾아준 역사적 진실이 있다.

미국은 전쟁 기간 동안 한국 땅에 폭격을 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를 도와줬다.

1945년 미군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과 광복군이 함께 서울에 침투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김구 주석은 미국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해방 직후 미군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음으로 1950년 한국전쟁은 한국 경제를 완전히 파괴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에 미군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즉시 유엔군을 조직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3년 동안의 전쟁에서 미군은 4만5000명이 전사하고, 9만30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8000명은 행방불명이 됐다. 그밖에 유엔군의 희생도 1만명이 넘었다.

한국전쟁은 한국 경제는 물론 민간인의 희생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비극이었다.

미국은 1953년부터 1963년까지 45억 달러를 10년 동안 무상원조를 해주었다.

미국의 원조는 전력, 도로, 농업, 4H운동, 기업재생 원조, 교육, 물자 지원 등이다.

한국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됐다.

필자는 당시 주한미경제원조처 기록과에서 근무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경제원조처에는 한국의 기업인, 정부 장관과 국장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찾아오곤 했다.

1964년부터 1965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무역박람회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수출을 위해 전력을 다할 때였다. 그때 한국의 GNP는 10만원 정도였고,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출할 상품도 없었고, 대학 출신 실업자도 많았다. 1964년 비로소 한국은 세계무역박람회에 진출하게 됐다.

필자는 운 좋게 시험에 합격해 무역진흥공사(KOTRA) 임시직원 자격으로 미국 뉴욕에서 일을 했다. 한국기업 지사는 1966년까지도 하나도 없었다.

미국 시장에 가발이 들어왔으며, 쿼터제 없이 섬유, 장난감, 전자제품, 자동차, 철강 등 많은 수출품이 진출했다.

미국 시장을 발판으로 한국 수출품은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지금 한국 경제는 큰 성장을 이뤘다.

1966년부터 뉴욕에 한국기업 지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65년 뉴욕에 한국 공예품을 수출하기 시작한 한국은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필자는 공예품 수출에서 철강, 전자제품으로 성장·발전해온 시대를 보며 한국경제 성장 과정을 후세들에게 전하고 싶다.

한국은 미국 수출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 현장에서 직접 보아왔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당시 미국에 사는 한인 교포 수는 하와이 이민자를 포함해 약 2000명, 유학생 부부 80%였는데 지금 한인 인구는 130만명이다. 지금 비교해 보아도 큰 숫자다.

각 분야별로 미국에서 큰 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는 10년 후 한국에 큰 힘이 될 것이다. 해외 한민족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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