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9년 전 설치된 전략촌…‘4·3의 한과 눈물 서려’
(8)69년 전 설치된 전략촌…‘4·3의 한과 눈물 서려’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8.0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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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마을 초토화로 삶터 잃어
무장대 분리·주민 통제 목적
성담 두른 인공적인 마을 조성
비좁은 ‘함바집’서 집단생활
여성·노인도 야간에 보초 담당
▲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있는 낙선동 4·3성 성담과 내부에 있는 함바집 전경.

제주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됐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낙선동 4·3성(城)은 주민과 무장대를 분리시키고, 마을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든 전략촌이었다.


▲피난 갔던 주민들 희생


선흘리는 1948년 11월 21일 선흘초등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타며 소개됐다. 집이 잿더미가 되면서 주민들은 마을 인근 선흘곶의 자연동굴이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소개령을 내린 지 나흘만인 11월 25일부터 피난처로 삼았던 동굴이 잇따라 발각돼 많은 주민들은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후 엉물과 서우봉에서 집단 처형됐다. 미리 해안마을로 피난 간 주민들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됐다. 4·3 당시 선흘리 주민은 2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 1949년 전략촌으로 설치된 낙선동 4·3성 내부 전경.

▲설촌 69년이 된 낙선동 4·3성

 

1949년 봄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가 설치됐다. 사령부는 무장대를 주민과 분리시키기 위해 마을마다 성을 쌓고 전략촌으로 만들었다.

적에게 양식과 거처를 주지 않기 위해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기 위한 토벌작전의 일환이었다.

불타버린 선흘리 본동이나 선인동이 전략촌으로 재건돼야 했지만 인근에 선흘곶과 바메기오름이 있어서 제외됐다. 이곳은 무장대가 은신할 수 있어서다.


반면 선흘리와 함덕리 사이에 있는 낙선동은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허허벌판 언덕배기에 있어서 전략촌으로 낙점됐다. 자연부락이 아닌 이름 그대로 전략에 맞게 인공적인 마을이 들어선 셈이다.


축성작업은 선흘 주민뿐만 아니라 조천면 관내 전 주민이 동원됐다. 부녀자와 초등학생들도 돌을 날랐다. 1949년 봄 한 달 동안 작업은 이어졌다.

변변한 장비가 없어서 등짐으로 밭담과 산담을 나르다보니 어깨와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


1949년 4월 길이 150m·너비 100m·높이 3m·폭 1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총 500여 m의 길이에 달하는 성이 완공됐다.


성안의 네 모서리에는 경비 망루가 있었고, 이 사이에는 4개의 초소가 설치됐다. 초소에는 높이 2m 지점에 총구를 만들었다.

성 외곽에는 깊이 2m의 도랑을 판 해자를 만들고 가시덤불을 놓아 무장대가 성에 기어오를 수 없도록 했다. 중세 시대의 성처럼 사실상 요새나 다름없었다.

 

 

▲ 방과 마루, 부엌 구분이 없이 한 동에 5세대가 함께 살았던 함바집 내부.

▲고단했던 전략촌 생활


성 내부에는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함바집이 설치돼 주민들은 집단생활을 했다.


함바집은 길게 돌담을 쌓고 나무기둥을 세워 지붕에 띠를 덮은 구조였다. 방·마루·부엌 구분이 없었고, 한 동마다 다섯 세대가 살았는데 칸막이는 억새로 엮어 만들었다.


성안에는 함덕지서 파견출장소와 학교(선흘초등학교)도 들어섰다. 경찰 파견소는 66㎡(20평) 크기의 초가였고, 성안에 있음에도 이 건물에는 내성(內城)을 다시 둘렀다.


처음엔 50세대가 입주했지만 인구가 불어나 많을 때는 250세대가 머물렀다. 성 밖 출입 시 통행증을 받아야 했다. 밤에는 통행이 제한되기도 했다.


야간 경비는 중요한 일과였다. 주민 가운데 청년들은 무장대 동조세력 또는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나마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대부분 자원입대했다.

 

 

▲ 성벽 2m 높이에 설치된 총구.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들의 몫이 됐다. 이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다.


통행제한이 풀린 1954년. 성 안에 살던 주민들은 고향 선흘리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정착해 오늘날 낙선동 마을을 이루게 됐다.


4·3성 대부분은 1954년 4·3사건이 종식되자 밭담과 산담, 집담 등 원래 위치로 돌아가면서 사라져버렸다. 반면, 낙선동 성담은 마을의 방풍역할을 하면서 허물어지지 않았다.


무장대 습격 차단이라는 명분과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건립된 낙선동 4·3성은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게 됐다. 제주도는 2009년 17억원을 들여 성곽과 내부시설 일부를 복원, 유적지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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