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좁쌀 한 됫박으로 온 가족이 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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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동 4·3성 산증인 안시택씨
▲ 낙선동 4·3성에 정착한 안시택(71)·박수자씨(65) 부부가 경비 망루에 올라 성 내부를 설명하고 있다.

안시택씨(71)는 두 살 때부터 낙선동 4·3성에 살아온 토박이다.


그의 부친 안창휴씨는 동굴에 은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발각됐다. 억수동 마을 인근 밭으로 끌려가 27살의 젊은 나이에 총살당했다.


“아버지는 함덕 해안마을에 내려가도 굶주릴 것에 걱정했죠. 곡식을 거둬 비상식량으로 삼아 동굴에 피신했는데 마을 청년들과 함께 끌려가 희생을 당했죠.”


부친이 희생된 이후 안씨의 할머니와 어머니, 형을 포함한 4명의 일가족은 1949년 전략촌으로 입성했다.


성안 사람들은 끼니 해결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집은 불타고 기르던 소와 말은 도망가면서 생계가 막막했죠. 어머니가 함덕마을에서 밭일을 도와주고 좁쌀 한 됫박을 얻어오면 이 걸로 온 가족이 하루하루를 연명했죠.”


집단생활을 했던 주민 모두가 가난해 이웃에게 식량이나 돈을 꿔줄 처지가 못 됐다. 주민들은 고구마라도 얻기 위해 하루 종일 걸어서 구좌 하도리까지 가기도 했다. 미군정이 나눠준 우유와 옥수수로 ‘깡냉이죽’을 쒀서 먹었다. 밀가루 포대는 검정물을 들여 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성 밖에서 농사를 지은 후부터 굶지는 않게 됐죠. 그러나 흉년이 들면 밀기울(밀 껍질)을 먹으며 연명했죠.”


하루 한 끼를 먹기도 힘들었던 시절, 경비와 노역은 고통이었다.


“성은 한 달 만에 축성됐지만 해자를 파고 가시덤불을 놓는 작업은 일 년 내내 지속됐죠. 저녁때면 지서에 보고를 하고 경비를 섰죠. 비상시에는 새끼줄에 매단 깡통으로 서로에게 연락을 했죠. 당시 경찰은 이곳의 왕이었고, 그의 말은 곧 법이었죠.”


그런데 성의 동쪽은 암반지대여서 해자를 만들 수 없었다. 1951년 봄 무장대는 이곳으로 습격했다.


“무장대가 동쪽 성벽으로 침입해 경찰 가족이던 한 여인을 납치해 갔는데 나중에 들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죠. 본보기로 처형한 것 같았습니다.”


안씨는 낙선동을 떠나지 않고 정착했다. 일흔 한 살인 그는 낙선동 4·3성 관리인이자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는 해마다 1만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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