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오라리가 낳은 뛰어난 항일운동가…정치적으로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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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흠, 제주 첫 사상단체 ‘신인회’ 창립
고계, 고을나의 15대손…신라에 내조
고계정, 정의현감…‘청렴정치’ 베풀어
고광림, 韓 최초 하버드대 법학박사
주미공사로 UN총회 대표대사 등 역임

▲고경흠高景欽:1910(융희4)~?, 고려공청高麗共靑 및 조선공산주의자 협의회의 항일활동. 언론인. 한학자 고성집高性諿의 아들, 제주시 삼도리<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항일 운동가 고순흠高順欽의 8촌 아우이다. 1925년 제주의 첫 사상 단체 ‘신인회’의 창립 멤버이다.

 

앞서 서울의 정동(貞洞)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3년 경성공립중학교에 입학해 1926년 2월 중퇴하고, 4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1년간 수학하고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7년 3월 도쿄로 건너가 동년 5월 재동경 조선청년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 제3 전선사第三 戰線社를 설립하고 기관지 ‘제3 전선’을  발간했다.


1929년 3월 상해에서 ML파 공산주의 그룹의 지도자들과 만나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거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방침을 협의했다.


동년 7월 제주도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압송 도중 고베神戶역에서 탈출, 그 후 오사카를 거쳐 11월 중국 천진天津으로 건너갔다.


1930년 11월 북경으로 가서 한위건韓偉健(홍원)을 만나 당 재건 운동의 방침을 협의했다.

 

1931년 2월, 조공朝共 재건설동맹을 결성, 중앙 집행위원과 선전부원이 되었다. 동년 8월 하순 무산자사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1934년 7월 28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전향을 하고 인척 김근시金根蓍(이도)의 보증으로 1935년 11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될 수 있었다.


출옥 후 여운형呂運亨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 편집부원이 되었다.

 

1944년 서울에서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 결사 건국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동년 5월 ‘독립신보’를 창간하면서 주필 겸 논설위원이 되어 여운형의 정치 노선을 대변, 동년 10월 남조선노동당과 대립하여 사회노동당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자 중앙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11월 탈당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 다음날 장안 빌딩에서 조선공산당(장안파)을 결성하는 데 참여, 동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서기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김일성金日成과 회담하였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 결성에 참여하고 ‘미소공동위원회 대책 정치 위원’이 되었다.


동년 7월 19일 여운형의 암살 당시 동승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바로 월북, 1948년 최고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고 1956년 4월 제3차 조선노동당 대회 때에 중앙 후보위원으로 후보 서열 45위에 올랐으나 1963년 정치적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필자의 변) : 원적이 오라吾羅리<오라위>인 고경흠高景欽과 고순흠高順欽은 모두 제주가 낳은 뛰어난 항일운동가이다. 모두 유명한 문필가에 전자는 공산주의운동에 경도되고, 후자는 무정부주의에 경도되었다. 고경흠의 딸 아나운서 고여진高麗珍은 미스제주에 선발되어 일본에 가서 홍보대사 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분위기에 중정中情에 의해 제지 당했다. 마침 그의 스승인 신성여고 교장 최정숙崔貞淑이 고려진은 학도호국단 학생위원장이니 자기가 보증을 서서 함께 일본으로 가겠다는 것이어서 허락을 해 주었다. 최정숙보다 8년 연하인 고경흠을 서로 젊은 시절 잘 알고 있어 이런 일화를 남기게 된 것이다.


▲고계高季:생몰년 미상, 탐라국 시조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일선에는 12대손). 고후·고청 등 3형제 중 끝의 아우라는 뜻이다.


고후高厚 등이 처음으로 신라라는 나라에 내조하자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高淸에게는 왕자王子, 또 끝의 아우에게는 도내徒內라는 작위를 주었다. 이로부터 국호를 탐라라고 하였다.

 

신라에서부터 탐라의 건입포로 돌아와 대촌大村(현 제주시내)에서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계정高啓正:1832(순조 32)~?, 무신. 정의현감. 정의현 온평리<열온이> 사람, 고한주高漢柱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그는 강학수康鶴守의 후임으로 도임했다.

 

고권삼高權三의 형, 1885년(고종22) 고창현감을 역임, 이어 거제부사巨濟府使로 부임하였으며 재임 중 청렴한 정치를 베풀어 임지를 떠난 후 주민이 선정비를 세웠다.


고계정의 손자 고은삼高殷三·고권삼高權三 형제도 어릴 때부터 조부인 현감공으로부터 일본의 어장침탈에 대한 분개한 말을 늘 들은 바 있어 1927년 성산포에서 일본 어민을 집단 폭행한 사건의 배후인물이 되었다. 또 고권삼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도전早稻田대학 재학생 때 성산청년회를 조직 민중 계몽운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

 

▲고광림高光林:1920(일제강점기)~1989, 재미 학자, 외교관. 애월읍 하귀리<귀일>에서 애월리<하-물>로 옮겨 포목상을 경영하던 영곡靈谷공 ‘당오름’파의 죽강竹崗 고공아高公兒 장남이다.


고광림은 하귀리 개량서당에서 2년 배우고 애월공립보통학교 4년을 졸업해 1933년 제주공립심상소학교(일본인 학교)에 편입학編入學한 후 초등교육을 마쳤다.


1939년 4월 경성京城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1945년 3월 졸업, 인류문화학 교수 전혜성全惠星의 남편, 그는 해방 직후 서울법대에서는 ‘법사상사法思想史’를 강의하다가 1949년 도미해 러트거스대학에서부터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주미공사駐美公使로, 또 UN총회 대표 대사로, 미 대학교수로 지냈다.


부인 전혜성은 동암東岩문화연구소 창설, 이사장이다.


사업가 문창석文昌碩, 김문규金文奎 등과 함께 마을 발전에 큰돈을 희사한 3인에 대한 송덕비頌德碑가 남아있다.


일제 말기에 비농가들에게 육지부로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자 형제들 대가족이 충북 청주로 이거移居, 후일 고광림의 부친은 청주에 묻히고 모친은 미국에 묻혔다.

 

 

▲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고광림高光林·전혜성 박사 부부의 가족현양비顯揚碑. 이 비는 2005년 당시 북제주군수 서리 현한수와 북제주문화원장 김찬흡에 의해 건립됐다

한편 북제주군에 의해 2005년 하귀리 일주도로가에 ‘고광림박사 가족 현양비顯揚碑’가 우뚝 세워져졌다.


1954년에 하바드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4·19 직후 장면張勉 정권 시 은사인 주미대사 장리욱張利郁박사의 추천에 의해 한때 외교관 생활을 했으나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사임, 1961년부터 코네티컷주립대학 교수로 재직 중 제주대학과 자매姉妹결연을 주선하면서 고향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이 대학에서 국제문화연구원의 원장직을 맡아 한국학의 보급에 전력하였다.


부인 전혜성 여사는 학자이면서 교수,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대사文化大使로, 주부로, 어머니로 살아온 1인 5역의 감동적인 한국 여인으로서 삶의 궤적을 밟아온 인물이다.


특히 여섯 자녀 모두 미국 최고 명문대학인 하버드와 예일을 졸업해 의사, 법조인, 미술가로서 각각 정상급 엘리트로 활약하게끔 키워낼 수 있었던 어머니로서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장남 경주慶柱와 동주東柱는 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경주는 5개의 전문의자격을 갖춘 암癌예방 의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졌다.

 

3남 홍주洪柱는 한국 최초 예일법대 정교수로 임명되었고 막내 정주正柱는 보스톤 미술계의 괄목할 만한 예술가로 활약하고 있다.

 

한편 경주慶柱는 2000년 10월 19일 빌 클리턴 대통령으로부터 미美 암癌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받았으며 예일대 법대 교수로 있다.


아들 홍주洪柱는 예일대학 법대 교수로서 미국 이름은 헤럴드 고高라고 한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 국무부美國務部 인권담당차관보로 내정되어 한국계로서는 미 연방정부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로 기록될 그는 상원의 인준을 받은 후 임명받았다.


장녀 경신慶信은 서울의 중앙대 교수, 차녀 경은慶恩은 예일법대 유색인종 최초의 여성 석좌교수碩座敎授로 있다.


이들 가족은 무려 12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 가족 4명이 동시에 예일법대의 강단에 선 것은 200년 전통을 가진 예일대학에서 처음 있는 일로 주목받고 있다.

 

※(필자의 변) : 나는 문화원창설준비위원장(위원장 송봉규宋奉圭)과 관내 문화인들에 의하여 만장일치로 초대 북제주문화원장으로 선출되어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만4년 동안 하귀리 오일시장 구지舊址에 세운 2층 건물을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북제주군수 신철주申喆宙(귀덕)는 나에게 하귀리 출신 고광림高光林(애월)박사를 현양顯揚하고 싶어서 조형물을 세우겠다며 비명碑銘을 작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자녀들의 명성이 세계적이니 ‘高光林家族顯揚碑’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글을 썼다. 마침 과로로 신군수가 순직하여 임시로 현한수玄漢洙(납읍) 군수서리가 추진해 하귀1리 고광림 고택故宅 근처 일주도로 서회선西廻線 길가에 커다란 자연석自然石을 세웠다. 마침 준공하는 날에 미국에서 미망인 전혜성全惠星 여사<본시 서울 출신>가 참석해 첨화시중添花示衆이었다. 더구나 고 박사와 애월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인 장시영張時英(애월)과 김진수金鎭洙(제주-성안)도 참석해 의미가 깊었다. 점심 때에 나는 미리 그의 명성 높은 가족내력을 담아 십곡병풍十曲屛風을 마련해 그녀에게 증정하였다. 그때 그에게 물었다. “고박사의 아우 고광중高光宗은 미국에서 무엇합니까?” “2년전 암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의 초등학교 같은 학급 동창이며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벌고 수년 전에 귀향하고 돌아간 후에야 알아 만나지 못했습니다.” 분위기가 깊어지기에 “고박사는 유명한 박충훈朴忠勳 대통령권한대행의 누이와 결혼, 몇 년 뒤에 타계히니 전 박사의 친정에서 결혼 반대가 심했을 것입니다.”라고 짓궂은 질문에 “예. 나의 유학중 고박사의 간청이 너무나 컸고 꾸준한 애원에 굴복한 것입니다.”라고, 선물 병풍을 우송했더니 그녀는 인류문화학자로서 너무나 좋은 선물을 받았노라고 회답전화를 보내 왔다. 그리고 고 박사 부부와 우리 사촌과의 인연도 깊었지만 미국의 종형 김동흡金東洽(곽지)도 처음 의사로 도미하여 고박사와 몇 번 지도를 받았고 종제 김동빈金東彬(곽지)은 재미제주교포 회장으로 <고광림박사 행장자료>를 찾노라고 부인 전혜성 여사와 자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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