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평화회담’ 열렸던 옛 구억초,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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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타운하우스로 변해버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
주민들 “의미 깊은 장소…기념물 설치 거절 당해”
道 “회담 기록 정확치 않아 논쟁 여지로 설치 어려워”
▲ 4.28 평화회담이 이뤄졌던 옛 구억국민학교. 지금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국민학교 운동장 터는 밭으로, 학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타운하우스가 들어서 있다.

1948년 4·3사건이 발생 후 토벌대와 무장대 간 유혈 참극을 막을 수 있던 ‘4·28 평화회담’이 이뤄졌던 장소가 역사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19일 ㈔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옛 구억국민학교는 ‘4·28 평화회담’이 열렸던 곳으로 이후 협상이 무산됐지만 서로가 평화적으로 해결해보려고 모였던 장소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4·3 진상보고서 상에도 옛 구억국민학교가 ‘4·28 평화회담’ 장소로 기록됐다.


현재 이 곳은 1948년 11월 21일 당시 군경에 의해 불태워져 없어졌고, 옛 국민학교 운동장 터가 밭으로 바뀌었으며 학교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타운하우스가 들어섰다.


마을 주민들은 ‘4·28 평화협상’이 일어났던 장소에 대해 2000년도부터 지속적으로 제주도에 문화재 지정이나 기념비 등을 건립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구억리 주민인 박성수씨(73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역사적 장소에 대해 표지석이나 기념비 등을 설치해 줄 것을 줄 곳 요청했지만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마을의 산 증인이 있고, 학술적으로도 이미 보고 됐는데도 왜 이 곳을 배제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4·3을 겪은 1세대 나이가 80세 전후의 고령인데,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면 영영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릴것”이라고 덧붙였다.


1948년 당시 이 학교에 재학해 4·28 평화회담을 목격한 강영화씨(80세)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프차를 타고와 학교에서 한동안 머물다 자리를 떴다”면서 “그 때 주변 밭에 숨어서 장면을 목격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회담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제주도는 평화협상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표지석 지정 등을 미루고 있다.


이와 관련 제주도 관계자는 “최근 ‘4·28 평화협상’과 관련, 새로운 자료가 발굴돼 학술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어 표지석 지정 등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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