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기억법
제주 4·3의 기억법
  • 제주신보
  • 승인 201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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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

기억은 어떻게 가능한가? 밀란쿤데라는 “기억이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망명자들은 똑같은 이야기들을 구역질이 날 정도로 한다. 때문에 그 이야기들은 잊히지 않는다.”(『향수』)라고 썼다. 기억은 더욱 더 정교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러나 우리에게 4·3은 아직도 음습하고 불온하다. 정부의 헌법개정안에는 4·19혁명과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이념을 명시했지만 4·3은 없다. 3만에 가까운 제주 민중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남기고 있는가?

1948년을 건국절로 삼겠다는 세력들은 4·3을 폭동이라고, 해방 정국에서 남한 사회를 공산화하기 위해 좌익과 공산당이 일으킨 사건이라 폄하한다. 국정교과서는 남로당의 봉기로 4·3이 발생했다고 하여, 4·3항쟁의 구체적 계기가 된 국가권력의 책임은 사라진 서술 형태를 보인다.

제주 4·3연구소는 제주4·3사건을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제주 민중이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하고 있다.

강대국의 세계 전략에 반대하여 남한 단독 정부가 아닌 통일 정부를 고창하면서 일어선 제주민중의 항쟁이 아니던가?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건국을 방해하려는 폭동이 아니었다. 여전히 4·3은 유족인 친구들도 지겹다며 말을 가로막게 하는 뜨거운 ‘지슬’이다. 그래도 우리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말해야 한다.

친구인 배우 ‘소선’과 연락이 닿았다. 제주 4·3사건 70주년 특집다큐드라마 3부작 <순이 삼촌>에 참여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의귀초등학교에서 느꼈던 참담함을 이야기했다. 4·3사건 당시 학교는 잠시 폐교되었고, 육군이 주둔했었다 한다. 그런데 군경 및 토벌대가 사람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이에 반발한 무장대가 학교를 급습했는데, 이 사실을 알아차린 주둔군은 2시간여의 전투에서 무장대를 전멸시켰다. 시신 51구는 초등학교 뒷밭에 흙만 덮인 채로 방치되었다가 매장된 곳이 송령이골이다. 그런데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 명을 학교 근처의 밭에서 학살했다. 그들의 시신은 현의합장묘에 묻혔다. 일부 시신은 찾아갔지만 다수의 시신은 세 개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유족들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진정한 사과를 받지도 못했고,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사과하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용서하려고 합니다.” 친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 했다. 평화와 화해, 상생과 인권의 방향을 틀어쥔 유족들의 마음은 눈물을 뿌리게 했던 것이다.

춘분에 싸락눈이 내렸다. 비가 찬 기운 만나 쌀알처럼 내린다고 싸락눈이란다. 현기영은 「순이 삼촌」에서 싸락눈이 마당에 깔린 날 밤이면 한날 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시작되는 곡소리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우리는 말해야 한다. 그것이 상처이고 고통이어도 기억을 더듬어 동백처럼 뚝뚝 떨어져나간 원혼의 아픔과 열망을 말해야만 한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