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조선시대 한성부판윤 지낸 제주 출신 최고위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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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비, 제주에 파견된 원나라 관리
고덕우, 민란 진압·평정에 큰 공 세워
고두만, 무극대도교의 ‘항일 투쟁’
고두평, 일본서 조선독립청년단 활동
고두흡, 변호사 활동…6·25 뒤 납북
▲ 조선시대 제주목사 집무실이었던 홍화각의 전경.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릴 정도로 제주목관아 건물 중 가장 웅장했다.

▲고대비高大悲: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원나라에서 탐라에 파견된 관리.


1367년(공민왕16)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는 원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탐라에 피난할 목적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목호牧胡들의 영향권에 있는 제주 땅에 원의 궁정을 건립하고자 사전 답사를 위하여 어의주사御衣酒使 고대비를 파견한 것이다.

 

그는 탐라에 들어올 때에 원나라 조정의 금백金帛을 수송해 왔다.


▲고덕우高德羽:생몰년 미상, 고려 우왕 때의 탐라의 천호千戶. 1375년(우왕1) 11월, 차현유車玄有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탐라의 성주星主와 왕자를 도와 의병을 일으켰다.


그래서 고덕우高德羽는 민란을 진압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고두만高斗萬:1881(고종31)~1967,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본관은 제주, 고한호高漢豪의 아들로 산남 안덕면 창천리<창고-내>에서 태어나 보천교를 믿었다.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더구나 신도 김경식金景軾(71·화북)은 심한 고문으로 1940년 8월 18일에 옥사했다.


▲고두평高斗平:1919(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大阪 조선독립청년단의 항일활동.


한림읍 귀덕리<복덕-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1년 4월 15일 대판공소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권일, 고두평 등 조직원 6명은 검거되어 1941년 5월 30일 송치되었다.


앞서 김권일은 1938년 7월 오사카시 서성구西成區 남개정南開町에 있는 이토<伊藤> 법랑공장琺琅工場의 직공으로 있으면서 청년층을 포섭, 조직화하려고 기도하였다.


1939년 2월에 김金은 정학봉鄭鶴奉(경남 동래), 한귀동韓貴童(전북 남원)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정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9월 요시하라<吉原> 법랑공장에 고용된 이찬호李讚浩(경남 거창), 안장준安張俊(경남 함안) 등을 동지로 삼아 동년 10월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 전기사戰旗社에서 발행한 ‘조선 문제’ 등을 교재로 협의해 나갔다.


1940년 6월 상순 오사카시 낭속구浪速區 대국정大國町 소재의 다카기<高木> 법랑공장 직공으로 고용된 고두평高斗平(제주 귀덕리)도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


▲고두흡高斗洽:생몰년 미상, 광복 후에 한국민주당에 입당, 서울에서 정치활동에 우익진영으로 동참하였다.


표선면 표선리<당-캐>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거쳐 초등교육에 종사하다가 학구력學究力이 강하여 도일渡日하여 일본중앙대학 재학 중에 조국이 해방되어 귀국, 고려대학 법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1947년 10월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에 1950년 6·25로 공산군에 의해 납북拉北을 당하였다.

 

▲ 고득종高得宗 초상.

▲고득종高得宗:1388(우왕14)~1460(세조6), 문신. 한성부 판윤을 역임, 효행이 뚜렷하였다.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남성 안의 오현단 바로 앞에서 살았다. 상호군 고봉지高鳳智의 아들로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났다.


1412년(태종12) 2월 제주목사 윤림尹臨이 생원 고득종의 효행을 조정에 알리니 포상하도록 의정부가 승인하였다.


부친의 상을 만나 귀향, 1413년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蔭職으로 직장이 되고 이듬해에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고득종은 그는 제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계에서 많은 견제도 받았지만 영주英主의 덕성 속에서 향토심을 발휘하고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제주는 원과 고려에 행정관할이 번갈아 교체되는가 하면 반란사건도 자주 발생, 제주민이 다소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목축 행정의 영향에서 오는 점이 많았다.


더욱 ‘제주말’이 원의 번식된 것이므로 그것이 명나라 소유가 되느냐 이조의 소유가 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도 야기되었다.


항상 제주말의 귀속 또는 조공문제가 중국사신의 입에 회자되어, 그 방편의 하나로 제주자제濟州子弟 제도를 실시하고 1428(세종10) 4월 10일까지 제주출신의 청년은 서울에 있는 ‘제주경제소濟州京在所’의 추천장에 의하여 문무관의 말직을 주었으며 이는 다시 목사(안무사)의 추천을 받도록 규정해 놓기도 했다.


제주자제는 말타기와 병법과 활쏘기 중 하나를 시험해서 합격하면 병조兵曹에서, 문장과 산술算術을 시험해서 합격하면 이조吏曹에서 채용했다. 이러한 제도는 고득종이 실시하였다.


당시 제주자제 출신으로 현관에 오른 자 중에 실록에 나오는 사람으로 예조참의 고득종, 사정司正에 고상심高尙深, 예빈판관에 문방귀文邦貴, 부사정 김비金庇 등이 있었다.


고득종은 예조참의禮曺參議와 한성판윤을 지내었고 종마사와 관압사(鐘馬使, 管押使)로서 명나라에 두 번, 통신사로 일본에 한번, 제주에도 수차 왕명을 받고 다녀왔으며 제주향토와 국가를 위하여 헌신했던 제주출신의 최대의 인물이다.

 

1433(세종15) 12월 2일 첨지중추원사의 발령을 받았다. 이즈음 제주가 왜구 침입과 가뭄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그는 세종에게 진언하여 1434(세종16) 1월 30일 양곡 7천 석을 우선 보내는데 다짐을 받았으며 이에 더욱 조정을 움직여 쌀, 콩, 잡곡 1만 석, 소금 1백 석을 제주 3읍에 분급하게 조치하였다.


1441년(세종23)에 예조참의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세종 임금의 소갈증消渴病과 안질에 대한 약재를 얻어 왔다.

 

2년 뒤에 물러나와 동지중추원사·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448년(세종30)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효행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저술은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60년(세조6) 5월 이조에서 전지하기를 “죽은 참판 고득종 등을 모두 원종原從 3등 공신에 기록하라”하였으니 이때 259명이 같은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한성부 판윤으로 있을 때 경사자제직과京司子弟職科를 특설하도록 조정에 건의, 제주에서 올라오는 관리를 우대하였다.


이 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까지 존속되어 왔다. 고득종의 문장, 필법은 당시 남방의 탁관卓冠이라고 평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특히 홍화각弘化閣 석 자는 그의 글 솜씨로 남아 현재 삼성혈에 보관중이다.

 

전해지는 문장인 홍화각기는 1435년(세종17)에 지은 유명한 문장이며 또 영곡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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