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4·3에 보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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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정치부장
70년 전인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출범을 반대하며 600여 명의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종식됐지만 전개 과정에서 전체 인구(30만명)의 10%인 3만여 명의 도민들이 인명 피해를 당했다.

희생자의 33%는 저항할 힘조차 없이 두려움에 떨었던 어린이와 노인·여성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 동안 벌어진 초토화작전 때 중산간마을 95%는 불에 타 사라졌다.

제주섬은 그야말로 불바다가 됐다. 3만9285동의 가옥이 소실됐고, 이재민은 9만1732명이 나왔다.

9만여 명의 이재민들은 오랫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정신적·물질적 피해가 너무 커서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던 제주 공동체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무장대를 고립시키고 은신처를 내주지 않기 위해 해안선 5㎞ 밖으로 떨어진 산간지역에는 통행을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도로 간주해 총살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소개됐다. 하지만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마을이 많았다. 때마침 수확을 앞둔 시기였다.

옥수수와 소·돼지·닭을 놔두고 이틀 만에 해안마을로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토벌대가 온 마을을 불태우고 있다는 소식에 양민들은 허겁지겁 이불과 생필품,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동굴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했다.

이들에게 닥칠 운명은 너무도 뻔했다. 토벌대는 산중에 은신한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했다.

미 국무성 관리인 존 메릴은 논문 ‘제주도 반란’에서 “학살극이 절정에 달했던 1948년 12월 중순 무고한 양민 630명이 단 일주일 만에 살해됐다”고 기록했다.

1948년 11월 26일 조천읍 선흘리 목시물굴에서 주민 40여 명이 집단 총살당한 것은 반인륜적인 행위였다.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고문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이 목시물굴의 존재를 토해냈다. 군인들은 전날 고문을 받고 목시물굴을 안내한 사람도 현장에서 처형했다.

다른 지방에 온 군인들은 중산간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토벌대는 중산간 주민들을 적극 이용했다. 주민들을 길잡이로 끌어들여 토벌에 앞장세웠다. 총알받이인 셈이기도 했다.

군에서 토벌에 나오라고 하면 안 갈 수가 없었다. 거부하면 바로 죽음이었다. 중산간에 산재한 천연동굴과 곶자왈에 피신했던 많은 주민들은 한 마을에 살았던 이웃이 은신처를 실토하면서 많은 희생을 당했다.

무자비한 고문에 이어 자신은 물론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선 길잡이들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하나에 소중한 목숨을 잃었던 암흑의 시기였다.

4·3은 대한민국에게는 현대사의 비극이지만 제주사람들에게는 가족의 아픈 역사이자 이웃과 고향의 슬픈 역사였다. 내 자식과 남편, 부모를 죽게 한 이웃을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웃을 살인자라고 고발하지 않았고, 죽은 가족을 대신해 복수한 사례도 없었다.

제70주년 4·3희생자추념식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화해와 상생으로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이웃을 용서해 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정부는 보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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