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선생께
K선생께
  • 제주신보
  • 승인 201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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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현 수필가

 선생께서 모처럼 찾아오셨는데 적절한 방안을 마련해드리지 못했던 점 미안합니다. 자제분이 사업자금 융통을 위해 소유 부동산을 미리 넘겨달라고 요청 한다는 말을 들으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부인께선 재산을 미리 분재하여 자식들에게 명의 이전시켜도 괜찮은지 묻지만 저는 답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에게 잘 해주고 싶은 사모님의 마음 이해합니다. 부모 마음이야 자식이 원하는 데로 해주고 싶어 하지요. 저는 일터로 찾아온 나이 드신 분들과 보유 재산의 처리와 여생 계획을 논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정리하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겠지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사가 생각대로 되던가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이하게 여기거나 낙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특히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식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사랑으로 무장된 상태이지요. 아들을 믿는다고요? 혼인하여 처자식 딸린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또는 ‘왕년의 짝사랑’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인정하기가 싫겠지요. 하지만 현실의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일 뿐 타인처럼 되더랍니다. 흔히 착각을 하곤 합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여든 살 정도면 죽을 거야, 내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와 다르지, 내 자식은 나에게 효도할 거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얼마나 나에게 잘 하는데, 내 아내는 또는 내 남편은 다를 거야, 그간 수십 년을 동고동락하면서 인생길을 해쳐왔는데, 믿는다 믿어. 암! 믿고말고.” 바람대로라면 인생은 행복합니다. 문제는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외면하는 경우지요, 더 최악의 경우는 준 재산이 뭐가 잘못되어 증발해버린 때입니다. 다 넘겨준 부모와 다 넘겨받은 자식 모두가 살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불효자가 되는 경우도 많은 게 현실이지요.

 

자식은 젊기나 하지만 부모는 이제 나이가 들어 어떻게 해볼 도리와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일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대비책 없이 준비 없이 병석에 있어봐라. 자식도 배우자도 어디 갔는지, 찬바람 부는 방에 홀로 있는 인생이 되지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고독사(孤獨死)가 남의 일인가. 죽는 날을 어찌 알 수가 있나. 요즘 부고를 보거나 문상을 가보면 고인(故人) 나이가 아흔을 넘는다. 내 자식은 나에게 효도 할 거라고? 효행이 지극한 자식을 두었다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정도의 공덕이 있는 거다. 고맙고 감격 할 일이다. 그런데 누구 맘대로? 세상 일 어찌될지 누가 아나, 그 옛날 착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자식도 처자식이 있고, 세파에 시달리고 궁색해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누군들 부모에게 잘 하고 싶지 않은 자식이 있겠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친한 친구도 형제도 친척도 배신하고 등 돌리게 되는 게 세상사인데, 부모라고 예외가 될까.”


선생께서도 잘 아시는 L선생은 불원간 새로운 거처를 구해야 할 처지입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L선생 내외는 요즘 막막할 다름입니다. L선생 부부는 아들의 거듭된 사업 실패에도 이번에는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에 아들에게 남은 재산 모두를 넘겼으나 흔적도 없습니다. 아들은 행방불명 상태이고 손자들을 집에 데리고 있는데 집은 진즉에 경매로 팔려 곧 떠나야 할 형편입니다. 그 후유증은 큽니다. 잘못된 믿음의 대가는 심각하지요. 점점 평균 생존 연령은 길어만 가는데, 어디로 갈 곳이 없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할 위험이 상존합니다.


흔히 내 아내는, 내 남편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부간의 철석같은 신뢰는 좋습니다. 그간 끔찍이 아낌을 베풀던 남편이, 지극정성이던 아내가 이미 늙어서 마음은 있어도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돌볼 능력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요. 마음이야 끝까지 지켜주고 싶어도 무리했다가는 그나마 건강을 간신히 유지하던 아내나 남편이 무너져 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어쨌든 결과는 자신이 지고 가야 합니다.


다행히 자식들이 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서로 부모로부터 받은 지분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다 주고도 분쟁의 씨앗이 되어 불목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제에 살아생전에 주지 말고 내용비밀인 ‘유언공정증서’ 작성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허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경계와 영역이 필요합니다. 선생께서는 그게 당연시 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먼저 갈 때 혼자 남은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끝까지 품위와 존엄을 지키다 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뒤에 남은 나의 짝이 큰 걱정과 고생 없이 잘 마무리하고 뒤따라오도록 안전장치를 남겨두시길 권합니다. 세상 날씨가 험해지고 있습니다.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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