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고려 태조 때 ‘성주’ 칭호 받아…제주고씨 중시조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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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득중, 병조참판 등 역임…고만갑, 이인좌 무신란 진압 큰 공…공신으로 선정
고만첨, 송시열 등과 적극 교류…고말로, 고려에 입조…탐라국의 태자
▲ 탐라국 종묘대제를 봉행하고 있는 모습. 탐라종묘문화재단은 매년 4월 9일 제주시 아라동 소재 탐라원 성지에서 도내·외 고씨 종친과 도민 등을 초대해 탐라국 종묘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고득중高得中:?~1466(세조12), 문신. 자는 희중希中, 성주星主 고신걸高臣傑의 손자, 또 증참판贈參判 고봉인高鳳仁의 아들이다.

 

고득중은 병조참판·동지중추원사 등 관직을 역임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1463년(세조9) 6월 공무로 휴가를 얻어 고향 제주 섬에 갔다. 그는 배편으로 상경 도중에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아들 봉례랑奉禮郞 고택高澤이 아버지를 찾으려 나갈 때 역마驛馬를 내어주고 또 전라도 ·경상도의 관찰사에게 급보를 내려 연안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 고만갑高萬甲 문과文科 교지敎旨.

▲고만갑高萬甲:1681(숙종7)~?, 문신. 분무원종奮武原從 공신, 자는 성백星伯, 본관은 제주, 전적 고홍진高弘進의 증손이며 고환高瑍의 아들로 제주목 이호<오도롱>에서 태어났다.


해남현감 고만첨高萬瞻과는 재종형제의 사이였다.

 

1716년(숙종42) 9월 제주별견시재어사別遣試才御史 황구하黃龜河가 내도, 본도 유생들을 시취할 때에 응시하여 고처량高處亮, 정창선鄭敞選과 함께 문과 초시에 합격해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1년 6월 성균관 학유로 등용된 후, 성균관 전적·봉상시부참사를 거쳐 1726년(영조2) 6월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729년 예조좌량, 1730년 예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외직으로 함경남도의 고원高原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본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죽으니 수묘종제守墓終制로 예를 갖추었다. 1728년(영조4) 김일경金一鏡의 잔당 이인좌李麟佐 등이 일으킨 무신란을 진압하는 데 공훈을 세워 분무원종奮武原從 공신으로 녹권되었다.


▲고만첨高萬瞻:1672(현종13)~1730(영조6), 문신. 경상도의 해남현감, 제주 정의현의 문사. 일명 고만추高萬秋. 자는 사앙士昻, 남원면 의귀리<옷-귀>에서 태어났다.


1689년(숙종15)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제주로 유배되어 오니 그를 맨 먼저 찾아갔다.

 

예로서 교유하면서 식견을 넓히려 하였으나 얼마 없어 우암을 붙잡아가니 소년 고만첨은 울면서 석별을 고했다. 이 해에 전 호조판서 김진구가 우암의 뒤를 이어 이 섬에 귀양 오니 또 문안을 올리고 문하생으로서 글을 배워 6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과거에 합격했다.


1706년(숙종32) 가을 제주순무어사 이해조李海朝가 내도, 과장科場을 열어 시권試券을 지참 상경하여 이듬해 1월 예문제학 최석항崔錫恒이 시권을 과차科次하니 정창원鄭敞遠, 오정빈吳廷賓과 함께 초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1706년 김진구의 아들 북헌 김춘택金春澤이 유배오자 3년 동안 사사하였는데, 김진구에 이어 아들 전 이조판서 김춘택까지 부자 양대를 사사하게 된 것이다. 북헌은 고만첨과 오정빈을 산남가사山南佳士라고 극찬하였다.


1708년 정시에 나아가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으로 성균관 가주서·전적·직강·사예·사헌부 감찰 겸 춘추관 기주관·형조좌랑·예조정랑 등을 거쳤다.

 

외직으로 경상도 풍기의 창낙찰방昌樂察訪과 경상도의 해남현감, 강원도 평해平海군수를 역임했다.

 

고만첨은 말년에 경상도 순흥 땅으로 삶터를 옮겨 뜻을 펴더니 1730년 갑자기 서울에서 죽자 제주로 반장하여 서홍로西烘爐로 장지를 잡았다.

 

▲ 성주전 상량식 모습. 성주전은 탐라국 역대 성주(星主)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이곳에서 고씨 고려에 입조한 첫 성주 고말로부터 고봉례까지 17위의 성주를 모시고 있다.

▲고말로高末老: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탐라국의 태자. 918년 탐라 국주 고자견高自堅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938년(태조21) 12월에 태자 말로末老로 하여금 고려에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고려 태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성주왕자星主王子의 작을 내리고 특별히 예우하였던 바, 낮에는 세 번씩 접견하여 음식과 접대하는 방법이 임금과 같게 하였다. 이때 사신과 시종에까지도 답례로 물품을 후하게 내렸다.

 

이때부터 탐라국은 왕의 칭호는 없어졌지만 대신 성주星主의 칭호를 받아 대대로 그 위를 후손에게 계승하도록 하였다. 탐라가 종전의 자치권은 인정하여 다만 구당사勾當使를 파견하여 정사의 연락과 감독에 임할 뿐 직접 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성주 왕자 등에는 무산武散계급을 수여하여 이곳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성주에게는 운마雲摩대장군, 왕자에게는 유격游擊장군 등은 그 예이다. 제주고씨는 탐라왕은 고자견을 끝으로 하고 고말로로서 중시조中始祖 일세로 삼고 있다.


▲고명우高明佑:1896(건양1)~1929(일제강점기), 의사. 도립 제주의원 의관, 개업 의사, 제주시 건입동<건들-개> 태생. 1919년 3월 경성京城의학전문학교를 졸업. 의전醫專 재학 당시 재경在京유학생회 회장직을. 의사 경험은 경북도립 대구大邱의원에서 재임했다.


앞서 전남도립 제주의원의 의관醫官으로 2년 재임, 1922년 모슬포에 고명우의원을 개설했다.


1927년 제주청년회 집행위원과 임원으로 활약, 제주 읍내에 한일병원韓一病院을 개업 운영하였다.

 

그는 의사 김유돈金有墩·김태민金泰玟과 함께 세칭 제주가 낳은 현대의술의 3걸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 무렵 건입동의 청년들로 조직된 용진회勇進會를 통하여 향토 발전과 봉사 활동을 펼치는 데 앞장섰다. 더구나 ‘용진회 축구팀’은 그의 재정적인 후원으로 도내 최고 팀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고명철高明喆:1833(순조33)~1892(고종29), 무신. 정의현감. 고한준高漢俊의 장남, 일명 고명철高明哲, 제주읍 삼양동<설-캐> 태생이다. 1884년(고종21) 12월 18일 이응문李應門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부임하고 1885년 9월에 그만두고, 1886년 홍재한洪在翰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임명되었다.


▲고명학高鳴鶴:1769(영조45)~1836(헌종2), 문신, 노친을 위해 벼슬 사양, 제주 정의현의 문사. 자는 자화子和, 호는 우졸재愚拙齋. 서귀포시 상효리<웃-쇠둔>에서 고천주高天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4년(정조18) 3월 제주위유안핵시재어사 심낙수沈樂洙가 내도하여 시취할 때 시詩 분야에서 으뜸으로 뽑혀 초시 문과에 급제하여 전시殿試를 보게 되었다.

 

고명학을 상신, 조정에 보고하니 장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버이가 늙으셔 봉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또다시 대정현감으로 임명하여 양친에게 편리하도록 하였으나 마침 친상을 만나 이를 거절하였다.

 

1795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처음 찰방을 제수했으나 노친의 공양 문제로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 1814년(순조14) 제주찰리 겸 위유어사 이재수李在秀가 입도, 양제해梁濟海의 난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코자 인재를 등용할 때 고명학을 상신, 조정에 보고하니 장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버이가 늙으셔 봉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본시 집안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특히 한시를 잘 지었으며 양친을 잘 모시어 효행으로 알려졌다.

 

‘왕조실록’에도 “정의에 사는 전 찰방 고명학은 행실이 방정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그의 문장으로 전해지는 것은 어사 심낙수가 시취할 때 시제試題 ‘이궐포귤유以厥包橘柚’로 쓴 한시 시권試券 문장이요, ‘정의향교 대성전기大成殿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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