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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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호 시조시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엘리엇이 노래했듯이 제주도도 그렇다. 1948년 4·3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피해 마을 중에 제주시 연동(蓮洞)도 매우 컸다. 1949년 1월 소개령이 내려지고, 일명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9연대에 의해 중산간 마을에 대한 진압작전이 일사분란하게 전개됐다. 때문에 주민들은 살기 위해 산이나 해변으로 뿔뿔이 해어졌다.

 

이 때는 무장대에게 들켜도 위험하고, 군경에 들켜도 불순분자로 오인 받을 상황이었으니, 한 마디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불안의 나날이었다. 그러다 3월이 되자 오라 3동 주민들과 해변에 가 살던 연동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호동에 성담(높이 8m 길이 700m)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자 산에 숨어 살던 사람들도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성담밖엔 2m의 함정을 팠고 흙더미 위엔 실거리나무를 심었다.

 

성 안에 지은 집이 129호나 됐다. 성담 위엔 세 군데 보초막도 지어놓았다. 밤이면 15세 이상 60세 미만 남자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샀다. 그리고 성담 안으로 긴 줄을 매고 자갈을 담은 깡통을 달아놓았다. 만일의 사태에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비상수단이었다. 정문 옆에는 지서가 있었는데 해질 무렵이면 사이렌을 울렸다. 밭에 가 일하는 분들에게 성안으로 빨리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1951년 1월 밤 1시경 20여 명이 무장대가 성(城)안으로 침투했다. 갑자기 깡통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보릿짚 눌 속으로 가 숨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동쪽에서 ‘꽝’하는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침 성문 옆엔 군복 차림의 산사람이 죽어 있었다. 윗주머니엔 미제숟가락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박 지서장도 죽었다고 하였다. 연동은 4·3으로 인한 피해가 사망자 106명, 자연부락 가옥 137호가 불에 모두 소실이 됐다고 ‘연동향토사’는 기록하고 있다. 제주 4·3 평화공원 서쪽 지역엔 행방불명인 표석 3895기가 서 있다. 형님도 들어 있다. 올해는 4·3 70주년이다.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제주뿐만 아니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또한 TV, 라디오, 신문까지 앞 다투어 4·3에 대한 내용들이 보도되고 있다. 오늘은 오전 10시 평화공원에서 추념식이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말씀을 할까. 4·3의 완전 해결을 위한 정부의 시책을 시원하게 밝혀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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