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가엾은 님들…밤이면 고향 마당 찾아와 별이 돼 내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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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의귀리 등 중산간지역 군인 습격…고문 등 일삼아
‘의귀초 수용인’ 구출 나선 무장대 전멸…수용인 80명마저 보복성 희생
후손들, 조상 기리는 ‘현의합장묘’ 조성
▲ 양봉천 전 현의합장묘 4·3유족회 회장이 묘역 조성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어김없이 오는 봄, 들에 퍼진 따스한 기운은 차가운 대지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한 해의 야속함만 보탠다. 이 아름다운 한라 산천에 살던 가엾은 님들은 오늘도 밤이면 고향 마당에 찾아와 소리 없는 별이 돼 내린다. 한때는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아들, 동생, 가족이었던 시절도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흩어져 차라리 악몽을 꾸었길 바랐던 제주 사람들. 지난 시절 세계사에서 인간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당한 지역 중에 제주보다 더 참혹했던 곳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70번의 봄이 찾아온 2018년 4월 3일, 억울한 4·3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역사의 진실을 새기며 미래 평화가 한반도에 영원히 퍼지길 기원한다.

 

햇살이 따사로운 날 현의합장묘를 지키는 양봉천(梁奉天) 선생(전 현의합장묘 4·3 유족회장)을 만났다. 선생은 1947년생으로 남원읍 의귀리 403번지에 살다가 3년 전 서귀포시 대륜동으로 이사했다.

 

양봉천 선생이 현의합장묘를 지킨 이유는 군대 가기 전이나 다녀와서 보니 변함이 없어서 1974년부터 2017년까지 43년간 ‘현의합장묘 4·3 유족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4·3해설사를 하고 있다.

 

▲현의합장묘 영령의 슬픈 사연


현의합장묘, 외로운 넋들이 함께 잠든 곳. 그 이야기는 이렇다. 남원읍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다른 지역보다 열흘쯤 앞선 1949년 11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토벌대는 이곳 중산간 지역에서 집에 불을 지르고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 주변과 돌담 밑에서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는 수색 중에 발견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가 하면 일부는 학교 안에 임시로 수용했다. 토벌대는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을 가할 뿐만 아니라 학살도 일삼았다.


이에 무장대는 이들 주민의 안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년 1월 10일(음 1948년 12월 12일) 새벽, 의귀국민학교를 습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주둔군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명은 1월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학교 동쪽 약 200m 지점(의귀리 1506-6번지)의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인들이 양민들을 살해해 버린 것이다(현의합장묘 안내서)

 

▲현의합장묘 조성 경위


양봉찬 선생은 어린 때 집안사람들이 거의 돌아가시자 제일 처음 현의합장묘 후손들인 어른들을 따라서 구(舊) 묘역에 가서 벌초를 했다.

 

그때 큰아버지가 “너의 아방은 저기 묻혔다”라는 말해주어 계속 묘역을 관리하는 일에 쫓아다녔다. 구 묘역은 군대 갔다 와서 보니 군대 가기 전이나 후나 그대로였다.


그는 부사관이어서 남보다 군 생활을 더 오래 했다. 1974년도에 제대했는데 1960년대에 군대 갔으니 대략 6~7년 군 생활을 한 셈이다.

 

그는 1974년 제대하자마자 묘역을 맡아서 회장을 했는데 어른들밖에 없어서였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단합을 해야겠다 싶어서 1년에 1번 만나서 소주도 마시고 4·3얘기도 하자고 했다.


수망리, 토산까지 집집마다 마을마다 돌아가면서 가야 하니까 달 밝은 밤에 다니자고 해서 선생 전에 회장하던 할머니가 제안을 해서 정월 11일을 모이는 날로 정했다.


처음에는 다달이 모였었다. 12명이 돈 500원씩 모으기 위해서 다달이 모인 것이다.

 

1년이면 6000원이 되니까. 농협이 있어도 그때는 어려운 시절이어서, 그 돈을 민가에 3푼 이자로 빌려줘서 돈을 늘렸다. 돈이 있으니까 1983년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운 것이다.


그때 비석 문제로 지금은 고인이 된 김인호 박사를 찾아갔다. 그분이 며칠 있다 오라고 해서 다시 찾아갔더니 ‘의롭게 살던 사람들’이라는 뜻의 ‘현의합장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현의합장묘 희생자들은 1949년 1월 10일과 12일에 걸쳐 토벌대의 보복으로 죽은 80명이다.

 

이 영령들은 1950년도에 개탄물 변에 옮겨 묻었다가 2003년 현 수망리 893번지로 이장했다.

 

당시 이장한 현의합장묘 부지는 양봉천 선생이 새마을금고의 감사로 약 8년간 재직할 때 현재의 부지가 경매로 나오자 유족회와 의논해서 당시 1734평을 5200만원에 구입했다.


현의합장묘 조성 사업은 원래 종잣돈 모은 것이 있으니 이장을 해서 당시 민보단원이 파묻어버린 것을 유족들이 잘 묻어주자고 해서 부지를 물색하고 종잣돈 통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도(道)와 남제주군에 가서 지원을 받은 결과다.


유족은 모두 12명. 유족회의 명칭은 1964년에 처음 조직할 때는 ‘삼묘동친회’였는데 1983년 이후부터는 ‘현의합장묘 4·3 유족회’라고 했다.


현의합장묘 비석은 2004년도에 세웠고, 다시 2007년에 기념관을 지었다. 도내에서도 현의합장묘 기념관을 제일 먼저 세웠고, 영상물도 가장 먼저 제작했다.


현재는 가족 단위로 해서 기념관을 유지한다. 양봉천 선생은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자신 다음에 또 나올 것이라고 한다.


현의합장묘 세 개의 봉분은 개탄물에서 세 개를 그대로 옮겨온다는 취지에서 이곳 수망리 ‘신산모루’ 지경에 세 무덤으로 안장했다.

 

매년 음력 8월 24일에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현의합장묘 제사는 원래는 돌아가신 날에 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때는 여기가 눈도 많이 오고 겨울이라서 행사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동네 어른들과 의논하여 시제(時祭) 식으로 이장한 날을 기념하여 제삿날을 정한 것이다.   


사건 발생 54년 만인 2003년 9월 16일 이장을 위해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서쪽 봉분 17구, 가운데 봉분 8구, 동쪽 봉분 14구 등 총 39구(남자 15구·여자 7구·청소년 추정 2구 포함 성별 미상 17구)가 다수의 유물과 함께 확인됐다.

 

그러나 어린이의 유골을 비롯한 수많은 유골들은 이미 세월이 흘러 녹아버린 상태였다.

 

양봉천 선생은 지금 돌아보면 2003년 이장할 때 DNA 검사를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양봉천 선생의 집안은 아버지, 형님, 매형 2명, 사촌 2명, 삼촌네 두 부부, 사촌의 자녀들 등 모두 10여 명이 희생되었다. 자신은 아버지와 형님 제사만 하고 자손이 없는 경우는 조카뻘 되는 목사가 제사한다고 했다. 

 

▲ 양봉천 선생의 형 양봉석의 나무도장. 제주비행장에서 유해와 함께 발굴되었다.

▲나무 도장으로 형님을 찾은 사연


양봉천 선생의 형은 양봉석(梁奉錫)은 1931년생이다. 제주비행장 인근에서 발굴 시 도장이 발견되어 형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형님 양봉석은 도장이 비행장에서 발견되어서 신원을 알게 되었다. 도장은 가슴 쪽에서 나왔다. 안주머니에 넣었었던 것 같다. 목도장인데 지금 도장하고 다른 것이 도장이 휘어져 있다. 왜 휘어져 있는가 해서 도장 새기는 어른에게 물어보니까 옛날은 그렇게 휘어지게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이렇게 깎아서 도장을 쥐었을 때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데 그때는 이렇게 휘어지게, 담배 파이프처럼 했다고 한다. 끝 쪽은 썩어버렸고 이름이 있는 부위만 도장 기름이 스며들어 썩지 않았다. 4·3평화공원의 장윤식 씨가 밀감 따는 철에 전화가 와서 도장이 나왔는데, 도장에 새겨진 이름이 ‘양봉석’이라고 해서 4·3 신고인을 찾아보니 나 양봉천 씨가 있어서 연락했다고 했다. 그래서 형님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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