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볼을 간질여 봄이 까르르 웃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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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김석희 번역가 자택(上)
신엄리 백일홍·명자나무·벚나무 등 가득한 곳서 축제 열어
‘베사메무초’ 노래에 빠져 사람이 나무 가 되고 바람이 되고…
▲ 바람난장 식구들은 지난달 31일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김석희 번역가 자택 앞마당에서 음악연주와 수필 낭독 퍼포먼스를 벌였다.

잔디

 

김석희

 

잔디를 깎는 즐거움은 먼저 그 소리에서 느껴집니다. 내 손이 기계를 밀고 나갈 때 회전 칼날이 돌아가면서 사각사각 풀을 베어내는 소리(그 없는 듯 들리는 청량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 마음밭에 가득 자라난 온갖 근심과 분노와 초조와 불안의 잡풀들까지도 뎅강뎅강 잘려나가는 듯하여 마음이 한결 가뿐해집니다.

 

소리와 더불어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 또한 즐겁습니다. 칼날에 저항하는 풀들의 떨림이 기계 손잡이를 통해 내 손에 전해지고, 그때 느껴지는 생명력은 그것이 비록 목숨을 겨누는 칼날 앞에서 내지르는 비명이라고 할지라도 싱그러운 데가 있습니다. (아니, 내 마음에 이렇게 잔인한 구석이 있다니!)

 

또한 내 발은 기계가 지나가기 전과 지나가고 난 뒤에 달라진 잔디밭의 감촉을 구별하며 즐거워합니다. 나는 이 감촉을 더욱 즐기기 위해, 잔디를 다 깎고 나면 맨발로 돌아다닙니다. 그러면 이발한 듯 단정해진 잔디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꼿꼿하게 발바닥을 자극합니다. 한편으론 간지럽고 또 한편으로 찌르는 듯한 발바닥 느낌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질 때, 나는 대지의 기운이라도 받는 듯한 감각에 황홀해집니다.

 

다음은 코가 즐길 차례입니다. 풀잎 하나 꺾어도 향기가 나는데, 잔디밭을 깎은 자리에 어찌 향긋한 풀냄새가 진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의 후각에는 향긋하게 느껴지지만 풀의 입장에서는 피비린내에 다름 아닐 테니, 풀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잔디 깎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기분 좋게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 시간 남짓 잔디밭을 깎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는데, 그게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습니다. 운동을 통해 일부러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평소 노동과는 무관한 생활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얼마나 즐겁고 뿌듯한 일인지 모릅니다.

 

* 김석희 번역가의 수필 ‘잔디’ 전문.

 

궁금했다. 그 집 마당의 풍경이 몹시도 궁금했다. 햇살이 눈부신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전이어서가 아니라 번역가 김석희 선생의 집 마당이기 때문이다.
애월읍 신엄안2길을 따라 가다보니 돌담가에 차들이 이미 길게 늘어서 있는 이층집이 보인다. 저만치 반가운 얼굴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아직 바람난장이 시작되기 전인데 경쾌한 악기 소리가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꽃잎을 흔들어댄다. 마당에 들어서서 보니 민들레처럼 노란 옷을 입은 연주자가 판푸르트를 불고 있다. 장독대에는 음료와 과일이 놓여 있고 백일홍, 명자나무, 앵두나무, 후피향나무, 다정큼나무, 벚나무가  속닥속닥 수군대고 있다. 무슨 일인지 저들도 궁금한 것이다.


 
애월바다 위로 비행기가 날고 사회를 맡은 연극인 정민자씨가 바람난장의 시작을 알린다. 옅은 화장이 화사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미소 때문일 것이다. 바람난장의 시작은 역시나 대표의 인사말이다. 센스있는 김해곤 대표는 짧고 굵게 인사말을 남겼다. ‘감동을 자아내는 바람난장이 되기를 바람니다.’ 라고.


 

▲ 김도형 기타리스트가 ‘고향의 봄’과 ‘회상’을 연주하고 있다.

바람난장의 첫 순서는 기타 연주다. 맑은 하늘, 밝은 햇살, 푸른 잔디, 이것들과 잘 어울리는 악기가 기타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한 때 뚜럼브라더스로 활동했던 김도형 기타리스트가 연주에 앞서 봄날보다 더 활짝 웃으며 ‘봄이잖아요.’라고 말한다. 잔디밭에 이사 온 민들레들도 까르르 웃는다. ‘고향의 봄’과 ‘회상’을 들으며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작가는 사진을 찍는다. 노시인이 잔기침을 콜록거리기도 하고 멋진 중절모를 쓴 집주인이 선율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앵콜곡으로 연주한 ‘회상’은 김도형 기타리스트가 직접 만든 곡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순서는 수필낭독이다. 연극인 부부로 잘 알려진 두 사람이다. 강상훈, 정민자 부부가 김석희 선생의 수필 ‘잔디’를 낭독한다. 참으로 조화로운 음색의 만남이다. 깊고 부드럽고 또렷한 소리는 수필의 맛을 한층 풍부하게 살려준다.

 

▲ 강상훈·정민자 연극인 부부가 김석희 번역가의 수필 ‘잔디’를 낭독하고 있다. 김도형 기타리스트가 배경음악을 연주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시골에서 살면 절기의 변화에 맞춰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로 시작되어 ‘노동을 통해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평소 노동과는 무관한 생활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얼마나 즐겁고 뿌듯한 일인지 모릅니다.’로 끝나는 수필낭독을 눈감고 듣고 있으니 호사가 따로 없다. 그저 봄날의 기쁨일 뿐이다. 낭독이 끝나고 김석희 선생이 말한다. ‘3년쯤 전에 쓴 글입니다. 잡초도 이름 있는 풀들인데 공생을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잔디를 깎지 않고 그냥 둡니다.’


 

▲ 서란영 연주자가 팬플루트와 오카리나 연주로 바람난장 가족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사회자가 또 다른 연주자를 소개한다. 반백의 머리에 꽃핀을 꽂고 파란잎들이 새겨진 노란판쵸를 입고 있는 그녀는 한 마리 나비같다. 그녀의 이름은 서란영!
팬플루트와 오카리나로 우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곡은 ‘베사메무쵸’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야외공연의 클라이맥스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날이다.
마당! 그렇다. 마당에서 펼치는 바람난장이기 때문이다. 김석희 선생의 집 마당에서 우리는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잔디가 된다. 하늘이고 바람이고 바다다.

 

-다음 주에 계속

 

글 손희정
그림 유창훈
동영상 김태현
사진 허영숙
수필낭독 강상훈 정민자
팬플루트와 오카리나 연주 서란영
기타연주 김도형
음악감독 이상철

 


‘예술나무심기 프로젝트’에 도민 여러분들의 후원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예술나무심기는 문화예술의 향기를 전도에 퍼뜨리고,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된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바람난장이 마련한 프로젝트입니다. 제주의 환경과 생태가 안정화되는 날까지 나무심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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