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목시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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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어찌 필설로 다할까. 4·3은 끔찍했다. 70년이 흘러도 상처 깊어 아물지 않는 역사다. 화해와 치유를 내걸지만 무얼 두루뭉수리하게 안고 넘어가는 것만 같아 가슴 아리다. 얽히고설킨 데다 곰팡내 나게 묵혀 뒀으니 풀어내기 어려울 건 당연하다.

4·3은 애초 남한만의 단선과 단정 출범을 반대하며 무장대가 봉기해 일어났다. 7년여 만에 끝났지만, 그 어간 3만여 명 도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30만 명이니 인명 피해가 무려 1할에 이른다.

빈대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불태워라, 국가권력에 의한 초토화 작전은 입에 담지 못할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중산간 마을 95%가 불에 타 폐허가 됐고, 섬은 삽시에 화염에 덮였다. 집이 불타면서 9만여 이재민들이 기한(饑寒)에 허덕여야 했음은 말할 것이 없다.

중산간이 해변으로 소개(疏開)됐다. 그러나 소개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차마 농작물과 가축을 버리고 떠나기가 쉬웠을 것인가.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매 수많은 주민들이 숨을 곳을 찾아 동굴들을 전전했다. 토벌대는 은신한 양민들을 끌어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총살했다.

1948년 11월, 조천읍 선흘리 ‘목시물굴’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무참히 학살됐다.

몇 달 전, 굽이치는 산길을 돌아 4·3유적지 ‘목시물굴’에 갔다. 밖으로 나오라는 명에 순순히 따른 주민 40여 명을 집단학살했다 하고, 나머지는 끝내 안 나오자 굴속에 휘발유를 뿌려 불 지르고, 수류탄까지 터트렸다고 한다. 말로 할 수조차 없는 반인륜적인 이력이 적혀 있는 안내판에 눈길을 보내지 못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낱말이 우리말엔 없다. 설명될 수 없으니 말인들 있으랴. 희생자의 3할 이상이 아무런 저항할 힘도 없는 철부지 어린아이와 노인과 여성들이었다. 집을 나와 쫓기며 추위와 궁핍 속에 떨다 총살당하다니.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다. 오호라, 4·3은 이 땅에 다시 반복돼선 안될 참절비절한 비극의 역사다.

굴 입구를 철창이 막아선다. 지붕처럼 덮고 있는 펑퍼짐한 너럭바위 틈에 뿌리박아 거목으로 자라 오른 종가시나무를 맥 풀린 눈이 떠듬떠듬 어루만진다. 그새 4·3 70주년, 저 바위는 어간 모진 풍우에도 그대로이고, 나무는 아름드리 돼 그때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환청인가. 내지르는 벽력같은 소리에 숨 죽였던 숲이 휘청한다. “내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노라.”

숲 아래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밟고 나오며, 4·3 희생자들 앞에 이 시대의 평화와 풍요를 누리는 우리는 무엇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귀로에 섰더니, 한 마리 까치 주검이 아스팔트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새는 제 명을 알아 숲속에 날개를 접는다는데, 어찌된 것일까. 하필 목시물굴에서 갓 빠져나온 찻길 위다. 굴과 새의 주검, 무슨 상관관계라도 있는 건 아닐까. 심사 울울해선지 우연한 것마저 한 가닥 필연으로 흐르려 한다.

아, 목시물굴! 뇌는 순간,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추수 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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