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 평생 한복 입고 상투 튼 최후의 제주 선비…孔孟之道 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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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생, 무극대도교 항일운동
고범준, 영어 능통…한은 홍콩영사 등 발탁
고병오, ‘간재 전우’의 제자로 일제에 저항
고병효, 2대 도의원…일본 감귤 묘목 수입
고병희, 비밀 결사 우리계 활동

▲고무생高戊生:1889(고종26)~?, 무극대도교의 항일활동. 안덕면 상창리<웃-창고내> 태생, 상예리<웃-열리>로 옮겼다.


1936년 12월경 고석호高碩浩의 권유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믿었다.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따라서 일제 당국은 우리의 민족 종교를 사교집단으로 매도하여 홍보함으로써 자연 교세도 소멸되었다.

 

▲고범준高範俊:1915(일제강점기)~2006, 高光林박사의 당숙, 호는 우담佑潭, 제주고씨 영곡공파 ‘당-오름’계, 고창섭高昌燮의 큰아들.


어릴 때 광령리<꽝낭이>에서 한문서당 공부를 하던 중에 부친은 애월 마을로 옮겨 고범준을 애월초등교로 입학시키려고 포목상을 차렸다.


그는 목포상업 5년을 거쳐 경성京城고등상업(서울상대 전신)을 졸업했다.


영어에 능통하여 정부수립 이후 한국은행 홍콩지점장, 외무부 통상국 정책과장으로 출발, 말년에 제주대학교 무역학과 강사로 재임했다.


한국은행 부총재 당시 영어 실력을 인정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그를 홍콩영사領事로 발령, 64년 재무부차관을 거쳤다.


성균관대 교수, 전북대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황조근정훈장 수훈하였다.


1979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칠보공예가七寶工藝家로 알려진 부인 이혜숙李惠淑여사와 서귀포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병몰, 큰아들 서울대학 교수 고건高建에 의해 서울로 옮겨져 세브란스병원에 안장했다.


세계의 석학 고광림高光林 박사의 당숙이다.

 

큰아들 고건(1948)은 1967년 경기고 졸, 서울대 공대 응용물리학을 거쳐 미국 버지니아대학원 전자계산학과를 나와 1981년 전자학박사,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차남 고훈高勳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졸, 대우大宇실업 리비아국國 파견 과장을 거쳐 주요 직무담당, 막내 고욱 高旭은 서울대학 공대를 거쳐 미 버클리대 공학박사를 취득, 모두 “그 아비에 그 아들이며 그 어미에 그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고병오高炳五:1899(광무3)~1972, 배일파排日派로 일관한 한학자. 자는 유상有常, 호는 정재正齋, 대정읍 상모리<모실-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진재眞齋 고형박高衡博에게 한문을 배웠다.

 

1918년 전북 부안扶安군 계화도界火島로 건너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생이 되었다. 제주 사람으로 간재의 유훈을 철저히 지킨 이가 고병오이다.


1926년 마지막 임금 융희황제, 즉 순종이 붕어崩御하자 정재는 크게 통곡하였다. 서울을 향해 북방요배北方遙拜를 올렸다.

 

1998년 7월 문하생들에 의하여 ‘고 정재 고병오선생 학덕비學德碑’가 대정읍 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정재 고병오를 이해하는 길은 곧 스승 간재 전우(艮齋 田愚)를 먼저 알아야 한다.


간재는 잘 알고 있어 대정의 선비 고병오에 대한 관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정재가 계화도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우고서 귀향한 그 이듬해(1822) 간재는 3000 제자를 길러내고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존왕 사상이 곧 애국 사상이라고 믿던 정재는 몹시 격분하여 “北望三千里 皇城入夢愁 壇前滄海水 萬折必東流(우리 한민족의 힘이 솟구쳐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 일본을 혼내줄 날이 올 것이다)”라며 한탄했다.


1940년 일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당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일본 백성이 아니라 하여 만사에 제약을 받게 되었으나 정재는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정재는 ‘옥중음獄中吟’을 지어 나라안이 온통 감옥이라고 하여 그 결구에 ‘一死非難就義難’이라 하였는데 이는 “한 번 죽기란 어렵지 않으나 정의 편에 서서 살기란 그렇게도 어렵구나”라고 읊었다.

 

▲ 서귀포시 대정읍 사무소 앞에 있는 ‘고 정재 고병오선생 학덕비’. 1998년 문하생들에 의해 세워졌다.

정재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이 1936년 ‘요정선생 문인권선회要正先生門人勸善會’를 조직해 선생의 가르침을 오래 따랐다.


그의 저서로는 ‘정재시집’, ‘정재잡록雜錄’, ‘경하耕暇수필’, ‘정재사초私草’, ‘대정현지縣誌’ 등이 있다. 이 대정현지는 정재와 동향의 교육자 박용후朴用厚가 번역하고 재편해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라 하여 공저로 간행하였다.


1972년 겨울 소위 유신시대라는 얼어붙은 계절에 정재는 운명殞命을 예견, 상투를 튼 채 의관을 갖추어 절명절필시絶命絶筆詩를 남겨 이승을 떴다.


한 평생 한복만을 입고 상투를 튼 최후의 제주 선비로서 오직 공맹지도孔孟之道로 일관하면서 이단지학異端之學을 거부하였다.


정재가 타계하여 달포쯤 지나서 문하생들에 의해 ‘정재고선생묘비正齋高先生墓碑’가 건립되었다.


▲고병효高柄孝:1912(일제강점기)~2003, 제주시 오라리<오라위>에서 고재식高才湜의 아들, 사업가.


그는 大阪此花甲種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해 박종실朴宗實 상회에서 9년여 동안 근무했다. 1956년 8월 13일 제2대 제주도의회 의원이 되었고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제주도농산종합장, 제주도표고생산협회 회장, 중흥산업사 대표, 고씨종문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선친 고재식高才湜:1895(고종32)~1981, 제주시 오라동<오라위>에서 생장하였고 고량부삼성사재단에서 근무하였다.


일본에서 감귤 묘목을 초창기에 들여와서 귤밭을 조성하였고 양봉업을 하며 시정 출입은 별로 하지 않았다.


▲고병희高秉禧:1900(광무4)~1964, 무정부주의 비밀 결사 우리계宇利契의 항일활동.


 잡화상 운영. 고재관高才寬의 아들로 삼도1동<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1920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 졸업했다.


1922년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재학 중 일본 거주 한국 고학생의 비밀 결사인 형설회螢雪會 및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다.


고병희(32)는 제주농업학교의 동기 동창인 조대수(趙大秀·28)를 비롯, 동지 고영희(高永禧·26), 강기찬(康箕贊·29), 김형수(金炯洙·27), 임상국(任祥國·25) 등과 함께 1927년 3월경에 무정부주의 연구 기관의 문고를 설치, 고병희의 제창에 따라 각자 월 30원씩 갹출하고 사상적인 서적을 구입해 서로 돌리며 읽었다.


항일운동으로 1931년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고병희와 조대수는 각각 징역 3년을, 고영희·강기찬·김형수는 각각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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