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으로 한밑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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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가 혼수 문제로 다투다가 끝내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최근 제주사회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신부측에서 혼수로 25평 아파트를 사주었는데 예비 신랑측은 그 아파트가 너무 작다는 것 등이 주된 불만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만 해도 남자 쪽에서 지참금을 들고 가서 처가의 문전에서 애걸을 해야 받아줄둥 말둥했다.

용납이 되더라도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처가에 노역을 바쳐야만이 겨우 아내를 데리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얻기가 그만큼 어렵고 비쌌던 것이다.

▲1930년대까지 제주사회에서는 보통 혼수가 이불 1채, 누비이불 1채, 요강 1개, 빗접 1개가 전부였다고 한다(金榮敦, 濟州島民의 通過儀禮).
그러다가 광복이 되면서 보통 혼수가 늘어나 이불 2~3채, 요 2~3채, 방석 4~5개, 이불상 1개, 경대 1개로 발전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불 3~5채, 요 3~5채, 이불상 1개, 이불장 1개, 화장대 1개, 방석 4~5개, 화로 1개, 솥 3~4개, 세숫대야 1개로 발전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면서 혼수 규모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일부 졸부들 사이에 자가용차와 아파트 열쇠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아들 결혼으로 재산 한밑천 잡으려는 나쁜 부모들이 있다는 것도 큰 문제다.

▲결혼을 비롯한 친족들의 경조사 부조도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특히 산남 일부지역에서는 2중.3중.4중.5중을 넘어서 결혼식에 봉투 7.8개까지 준비하고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제주전통사회의 혼례부조는 이러하지 않았다.
이를 테면 쌀이면 1되, 닭은 2마리, 달걀은 20개 정도, 보리쌀 1.5되, 콩 1.5되 정도였다고 한다.

신부에게는 신랑측 6촌 이내 부인들이 옷 한 벌을 선사하는 풍습이 있었고 신부는 답례로 시집 6촌 이내 부인들에게 버선 한 켤레씩을 선사하는 게 관례였다.

▲이렇게 소박한 제주의 결혼 풍습이 최근에 와서 일부 계층에서 혼수 값을 마치 경매식 매매혼의 형태를 취하고 부조를 마치 영수증 처리하듯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상 우리나라에서 혼수지참금이 너무 많아 사회문제화됐던 때는 공교롭게도 국운(國運)이 기울 무렵이었다.

이를 테면 고려가 망해가던 신우왕 때 그리고 임진왜란 직전, 광해군과 연산군 때였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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