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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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 수필가

광복절 이튿날, 독도 가는 길에 포항 호미곶 국립 등대박물관을 들렸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이집트 파로스 등대, 인천 상륙작전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팔미도 등대, 동해의 외로운 바위섬에 세워진 독도 등대 등을 둘러보다 도대(道臺)불에 시선이 멈췄다.


‘제주 어부의 불빛, 도대불’ 제하에 제주 해안을 따라 표시한 16개 지점과 서너 줄 설명이 달려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제주 토박이지만 도대불이 낯설게 다가왔다.
너울성 파도로 심한 배 멀미를 하며 독도 땅을 밟고 돌아온 후 최초의 도대불을 찾아 나섰다. 한 때 후손 끊긴 집안이 많아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렸던 조천면 북촌리.

 

마을 포구에 들어서니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 내움이 코에 와 닿는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고깃배들, 배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집어등과 울긋불긋한 깃발들. 갈매기 서너 마리가 끼룩끼룩 노래하며 고깃배 주변을 들락거리고, 먼 여(갓 바다에 있는 바위섬)에는 바다를 낚는 낚시꾼들이 한가롭다. 


마침내 포구 좌측 언덕배기, 가릿당 앞에 바당돌을 쌓은 높이 2미터쯤 되는 사다리꼴 조형물을 만났다. 바로 그 앞 검은 대리석 비에 새겨진 글이다.
‘(…) 이 등명대(燈明臺)는 속칭 도대불이라 한다. 바다에 나간 고기잡이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1915년에 마을 사람들이 세웠다. 처음에는 솔칵으로 나중에는 석유 등으로 불을 밝혔다.’


안내문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고, 마을 사람들이 자력으로 쌓은 도대불 사위를 돌아보며 돌탑을 어루만진다. 허물어진 돌담과 돌덩이들이 간간이 널려 있고, 오랜 세월 거친 해풍을 견딘 탓인지 엉긴 치아처럼 버러진 돌 틈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도대불 계단에 올라섰다. 탑 위에는 높이 57㎝, 너비 27㎝, 두께 10㎝쯤 되는 빗돌이 받침도 없이 외로이 서있다. 검버섯을 피운 앞면에 음각된 ‘大正四年十貳月建 御卽(記念)燈明臺’ 글자를 더듬는데 두 글자는 알아볼 수 없다. ‘기념’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 순간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 돌탑을 쌓으며 생을 일구던 어부들 모습이 눈에 어렸다. 게다가 총탄 자국과 훼손된 글자들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 4·3의 비극을 증언해주는 듯했다.


도대불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 19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솔칵(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의 제주어)으로 불을 지피거나 호롱불, 석유 등피를 사용하여 불을 밝혔다. 해질 무렵, 뱃일 나가는 어부들이 대(臺)에 올라가 불을 켰고 아침에 들어오면서 껐다. 때론 늦도록 배가 돌아오지 않아 애타는 가족들이 불을 다시 밝히기도 했다. 집 나간 자식을 밤새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거친 풍랑과 암초에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며 무사귀환을 기원했으리라. 밤이 깊어갈수록 파도가 포효하며 거세질수록 온 힘을 다해 불씨를 살리려는 솔칵불의 이미지를 그려본다.


물결마다 귀 기울이며 캄캄한 밤에 뱃길을 비추던 도대불. 그의 시대는 가고 등대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도대불 좌우에는 전기 에너지로 빛을 발하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노장(老將)이 된 도대불을 생각하며 서모오름으로 발길을 옮긴다. 언덕배기 돌 틈에서 모질게 자란 강아지풀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며 배웅한다. 얼마를 걸었을까. 오름 중허리에서 먼 등명대를 내려보니, 그 자리에서 못다 한 사연을 말하고 싶은 듯 손짓한다.


별빛도 달빛도 가린 밤, 힘겹게 노 젓는 어부들에게 광명을 보냈다. 때론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 배를 위로하고, 넘실대는 다려도(多來島) 바다에서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들었다. 이웃 가릿당에서 민초들이 올리는 신년제와 영등제, 백중제의 굿 소리와 4·3 광풍으로 400 여 양민들이 쓰러지는 핏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풍랑을 피해 포구로 들어오던 우도지서 경찰의 주검을 맞기도 했다.


밀물이 들어오자 모습을 감추는 다려도를 바라보며, 오늘도 묵묵히 서있는 돌탑을 생각한다. 지난 세월, 비바람 불고 눈비가 내리는 날에도 변함없이 빛을 비추던 도대불을. 그리고 자신을 태우고 또 태우며 손짓하던 솔칵불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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