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 성주·왕자 명칭 高·梁 세습…조선 태조 때 개칭
탐라 성주·왕자 명칭 高·梁 세습…조선 태조 때 개칭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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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례, 제주 안무사 등 역임…헌마로 태종이 총애 
고봉조, 계림동지회 활동
고봉지, 고봉례 동생…상호군 지내
고부옥, 광해군 때 정의현감에 도임
고사만, 해녀·농민 등 규합…일제에 투쟁
고사징, 모흥혈 등 유적 보존 앞장
고사훈, 제주시 승천로의 주인공…의병장으로 이름 떨쳐
발굴된 후 복원된 탐라성주 고봉례 부부 방묘.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을 지낸 고봉례는 조정에 빈번히 군마를 바치는 등 성의를 다하여, 태종의 지극한 은총을 받았다. 출처=김유정의 산담기행
발굴된 후 복원된 탐라성주 고봉례 부부 방묘.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을 지낸 고봉례는 조정에 빈번히 군마를 바치는 등 성의를 다하여, 태종의 지극한 은총을 받았다. 출처=김유정의 산담기행

▲고봉례高鳳禮:?~1411(태종11),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무신. 고인단의 현손. 탐라 성주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본관은 제주.


고려 말에 탐라가 여러 번 모반하므로 조정은 1386년에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과 대호군 진여의陳如儀를 제주에 보내어 말을 가져오게 하였다.


고봉례는 그들이 탐라를 위무하고 돌아올 때 함께 개경으로 들어와서 1388년에 제주축마畜馬 겸 안무별감安撫別監에 임명되었다.


1392년(태종 원년) 역성易姓혁명으로 이태조가 등극하자 고봉례는 1394년(태조3)에 말 100필을 헌마 하였다. 이에 태조는 쌀 백곡百斛을 고봉례에 하사하였다.


1402년 탐라성주 재직 시에 신라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여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하였다.


1407년 5월에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1410년경에는 제주 안무사가 되었다.


1411년 8월 아들 상온尙溫에게 세직世職인 제주도주관 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을 승습시켜 줄 것을 청하여 승계시키고 한성에서 죽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제주를 안무함에 큰 공이 있었고 태종의 지극한 은총을 받았다. 그가 죽으니 임금은 몹시 슬퍼하면서 부의賻儀로 종이 150권, 초 10정, 쌀과 콩 40섬, 목곽 등을 하사하였다.


▲고봉조高奉朝:1920(일제강점기)~1946 (미 군정기), 계림鷄林동지회의 항일 활동. 고정길高丁吉의 아들, 성산읍 성산리에서 태어나 오사카의 부친을 찾아 도항渡港, 1938년 5월 계림동지회를 결성했다.


이 학생 항일 조직은 일본 오사카에서 고학하던 제주 출신 학생들로 결성된 비밀 조직이다.


1941년 2월 25일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포시시布施市 소재 성동城東상업학교 야간부 1학년에 입학, 일본대학 전문부 특과 야간부에 재학하던 중 낮에는 김봉각金奉珏의 매형이 경영하는 금성金城제작소에서 김병목金丙穆과 함께 근무하면서 “조선 청년의 갈 길은 오직 하나,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길뿐이다.”라는 김봉각의 주장에 공감하고 함께 민족 문제를 중심으로 담론한 끝에 강금종姜金鍾, 한만숙韓滿淑 등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1942년 11월 18일 징역 1년 6월형에 집행 유예 3년을 언도 받았다.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고봉지高鳳智:?~1411(태종11), 무신. 상호군, 일명 고지봉高智鳳. 본관 제주, 전서공 고인단高仁旦의 현손, 전서공 신걸臣傑의 아들.

 

고봉례의 동생. 1411년(태종11) 7월 4일에 상호군 고지봉은 귀향 중 병사했다.

 

고봉지의 후임으로 전 호군 문방보文邦寶를 대신하여 제주정해진靜海鎭 도사수都司守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부의賻儀로 쌀과 콩 20섬, 종이 1백 권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고부옥高傅沃:?~1621(광해13), 광해군 때의 정의현감. 1621년(광해13) 1월, 이담李憺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3월에 재임 중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고사만高仕萬:1908(융희2)~1962,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활동. 본관 제주, 고행량高行良의 아들, 구좌읍 종달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 10월에 신재홍, 한원택, 채재오 등은 당시 발생하였던 성산포 해녀 사건을 통해 일본 정책의 악랄성을 비판하고 해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했다.


또 혁우동맹원 신재홍, 문도배, 강관순 등은 1930년 11월 초순에 모여서 향후 사회 운동의 방법에 대한 협의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재홍이 구좌의 책임자로서 1931년 11월 종달리 한향택을 제주도야체이카의 당외 분자로 가입시키고 고사만高仕萬, 채재오蔡載五, 한원택韓遠澤 등과 같이 종달리 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협의, 참석 농민 수십 명에게 “농민의 피를 짜는 악질 조합 반대, 종묘 강매 반대, 무상 부역 반대, 농민대중의 이익에 배치되는 면행정 반대” 등의 표어로 의식화하였다.


그는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에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사징高泗澄:1806(순조6)~1865(고종2), 유생. 호 원도源道, 본관 제주, 주성 동문밖 도련道蓮들 마을에서 태어났다.

 

1838년(헌종4) 제주목사 이원달李源達이 모흥혈毛興穴(삼성혈의 옛 이름)을 파서 옛 것을 살피려 하자 그는 반대의 선두에 서서 후예들과 반대하자 이를 중지했다. 이로써 본도의 사적지가 보존될 수 있었다.

 

1847년(헌종 13) 상경한 그는 고석제高奭濟와 상의해 영곡공靈谷公 고득종高得宗의 아들 태필台弼 이하의 파보를 처음으로 만들어 후손 간에 합보하고 서문을 춘추관 수찬관 김윤근金胤根에게 받는 등 제주의 연원을 보존·천명하는데 힘썼다.


1854년(철종 5) 그는 조정에 상소해 영상 김좌근金佐根의 윤허를 받아 제주향교 구내에 계성사啓聖祠를 건립할 수 있도록 앞장섰다.

 

▲고사훈高仕訓:1871(고종7)~1909(융희3), 한말 제주의 의병운동. 의병장. 자는 경지景志, 호는 초광樵㹰, 고영길高永吉의 차남으로 제주시 이도리<과양> 현재의 동광양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고구훈高龜訓, 고승천高承天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성州城에 살던 유생 고사훈은 이석공李錫公, 김석윤金錫允, 조인관趙仁官, 노상옥盧尙玉 등과 함께 거사를 의논한 핵심인사였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 불량배에 의해 시해되자 “일본인을 막지 못하면 황제 폐하도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하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촌로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고사훈은 1909년 2월 25일 조인관의 집에서 이중심·김석윤·노상옥·김재돌金在乭 등과 모여 기병起兵할 것을 결의하고 이중심과 함께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따라서 결전 거사일인 동년 3월 3일에 주성州城을 점령하기로 정하여 격문과 통고문을 2월 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돌렸고, 고사훈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당일 영락永樂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안성·광청 등지에서 장정 300여 명을 가담시켰다.

 

이때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는 관군·장정 30여 명을 동원하여 경찰과 공조하면서 의병 활동을 차단, 이에 출동하였지만 무력에 의존한 경찰과 맞설 수 없어 2월 28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당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지게 되었다. 동 3월 3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총살되었다.


후일 사라봉 모충사慕忠祠에 고사훈, 노상옥 등 의병들을 기리는 ‘의병항쟁 기념탑’이 세워졌다. 또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7년 2월 제주시에서는 제주경찰서 뒷편 변전소 주변 삼거리에서 제주제일중학교까지의 도로 700여 미터의 거리를 ‘승천로承天路’라고 명명하였으니 이는 고사훈 의병장을 기리는 뜻에서 제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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