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4.3 제 이름 찾기...완전 해결의 첫 걸음
(8) 4.3 제 이름 찾기...완전 해결의 첫 걸음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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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상황·정권에 따라 4·3 명칭 항쟁·학살·봉기·폭동 등 제각각
과거사 청산·진실 규명 이뤄지며 ‘항쟁’ 대신 ‘제주4·3’으로 변경
성격 규정 시 갈등·대립 반목 우려…현재 중립적 의미로 ‘사건’ 명명
제주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碑·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비석).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碑·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비석).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4·3의 완전 해결을 염원하며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70주년 슬로건이 정해졌다.

70년이 지나도록 4·3은 제대로 된 이름을 갖지 못했다. 역사에 부합하고 올바른 이름을 찾아주기 위한 정명(正名) 운동은 4·3의 해결을 위한 첫 걸음이 됐다.

▲4·3 전후의 역사 배경

1945년 광복을 맞아 귀환한 제주인은 약 6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제주인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역 귀환 현상이 벌어졌다.

대일교역은 일제시대에는 합법이었으나 미군정 시절에는 불법이 되면서 지역경제가 위축되고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으로 악재가 겹쳤다. 일제 경찰은 군정 경찰로 변신했고, 군정 관리의 부정·부패는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가두행진이 이어졌다.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유혈 진압에 반발해 3월 10일부터 도내 95% 사업장이 참여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총파업에 나선 2500여 명을 구금했고, 이 중 3명이 고문으로 사망, 도민들의 반발심을 자극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총책 김달삼 등 350여 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4·3의 시작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진행된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으로 피신한 어린이와 부녀자들.
1948년 11월부터 진행된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으로 피신한 어린이와 부녀자들.

▲4·3의 시대적 명칭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4·3은 이념적 굴레에 갇혀 좌익 무장폭동으로 덧칠해졌다.

4·3은 군사정권이 들어섰던 1980년대 초까지 ‘폭동’으로 불려졌다.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4·3은 민주항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국가 공권력의 탄압과 외부 세력에 의해 붕괴돼 가는 제주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민중의 저항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어 199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진 과거사 청산운동과 공적 영역에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이 시작되면서 ‘항쟁’이라는 용어 대신 ‘제주4·3’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념적 색채를 지우고 희생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현재 제주4·3은 ‘사건’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48년 11월 군·경 토벌대에 붙잡혀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수용자들.
1948년 11월 군·경 토벌대에 붙잡혀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수용자들.

▲4·3의 정의는?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된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은 ‘미군정기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전면 해제될 때까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수정했다.

이를 통해 가해자의 책임소재와 당시 상황, 그리고 피해 규모를 보다 명확히 했다.

그런데 5·18민주화운동, 4·19혁명, 5·16쿠데타와 같은 사건은 열흘 안팎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벌어졌기에 정의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4·3은 7년 7개월 동안 이어진 전투와 상호 보복이 이어지면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게 됐다.

대다수 희생자가 양민이고 제주 인구의 10%가 희생되면서 피해자 입장에선 ‘학살’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무장대 입장에선 ‘봉기’, 군·경 토벌대 입장에선 ‘폭동’으로 바라보면서 여전히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간인 희생자 중 86%는 토벌대에 의해, 14%는 무장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희생자 비율을 보면 군·경의 과잉진압이 맞지만 무장대에 의한 양민 피해도 엄연히 존재해 이념과 대결을 떠나 정명을 붙이기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4·3의 성격을 규정하는 정명에 따라 대립과 공격, 상호 비난이 재현될 우려가 제기돼 후세 사가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4·3을 연구해 온 제주도 김용철 학예사는 “4·3의 정명 문제는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가 축적되면 자연스럽게 이름이 붙여질 것”이라며 “이를 위해 전문가들의 경험과 지식이 널리 공유되고,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은 연구 성과물이 나와야한다”고 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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