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 없다” 한국인 최초 세계의 지붕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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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삼권, 재일교포 화가…조선청년전 등 참여
고상돈, 겨울 등반에 능했던 산악인…1977년 9월 15일, 세계 최고봉 등정
고상수, 제주개발협회 고문
고서흥, 곡식 300섬 보태어 도로 건설 ‘큰 공’
고석구, 집의계 12의사
화가 고삼권의 그림 재일제주인 노생토역사(在日濟州人 の生と歷史).
화가 고삼권의 그림 재일제주인 노생토역사(在日濟州人 の生と歷史).

고삼권高三權1936(일제강점기)~?, 재일교포 화가畵家, 조일朝日우호전, 평화전平和展에 출품, 아버지는 제주도 강정동<가래-> 출신이다.

1960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재일조선인미술전, 조선청년전에 참여하였고 일본 앙데팡당에 출품을 하였다.

그는 오사카<大阪>에서 출생한 재일동포 2세로, 도쿄<東京>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에서 유화油畵를 공부하고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의 비판과 저항의 화가로 알려진 고이노우에-쵸자부로’<井上辰三郞>에게서 많은 것을 사사師事받았다.

고상돈高相敦1948(분단시대)~1979, 산악인.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등정한 최초의 한국인.

제주-성안칠성로에서 아버지 고용종高用鍾과 어머니 박지수朴智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북 청주淸州상고를 거쳐 청주대학 경영학과 2년을 수료했다. 1965년 충북산악회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등산인으로서 출발했다.

그는 특히 겨울 등반에 능했고, 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遠征隊의 일원으로 참가해 1977915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에 성공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915일을 산악인의 날로 정했으며,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가 되었고, 포스트·몬순 기간의 등정으로는 세계 세 번째라는 기록을 세웠다.

19784월 이희수李禧受와 결혼하고 동년 5월 네팔 정부 초청 세계 에베레스트 등정자 세미나에 참석하고 동년 7월 미국에서 2개월간 재미동포를 위한 에베레스트 등정 사진전을 개최하였다. 1979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1m) 원정대 대장으로 참가해 529일 우리나라 최초로 정상을 정복했으나 하산하다 웨스턴 리브 800m 빙벽에서 추락, 이일교李壹敎와 함께 현장에서 숨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체육훈장 맹호장猛虎章을 추서했다.

19801017일 재경在京 제주도민회와 제주산악인회 공동 주최로 국내외에 거주하는 제주도민의 성금에 의해 한라산 1100고지에 유해를 안장하고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짓고 서예가 박태준朴泰俊이 썼으며 비문 내용은 이 정상의 사나이는 일어섰다. 1979529일 하오 715분 북미의 최고봉 매킨리 6194m 정상에 올라 감격의 태극기를 휘두르더니 어찌 알았으랴 1시간 뒤 하오 8시 반 성공한 긍지를 안고 하산하던 길에 무정한 빙벽에서 두 동지와 함께 추락하여 불행한 슬픈 최후를 마칠 줄을! 신이여 왜 우리들의 보배를 앗아가나이까! 이 아픈 심정을 어떻게 달래오리까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우리들 가슴속에 길이 살아 계시리.”

구완희 작가의 재미있다! 한국사로 본 고상돈과 에베레스트=얼마 전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인 매킨리의 이름이 데날리로 바뀌었다.

사실 데날리는 이 산의 원래 이름이다. 데날리에 자리 잡은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이 수천 년 동안 그렇게 불렀다. 데날리는 원주민어로 높은 곳’, ‘위대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알래스카가 미국 땅이 되고 30년 쯤 흘러 미국의 한 금광업자가 데날리란 이름을 매킨리로 바꿨다.

40년 전부터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매킨리를 데날리로 바꿔달라고 정부에 요청, 20148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원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데날리산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올랐던 고상돈이 마지막 숨을 거둔 산이다. 1977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던 고상돈은 2년 후 데날리 정상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지만 내려오다 추락,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고상돈 대원이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등반 성공을 알리고 있는 모습.
고상돈 대원이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등반 성공을 알리고 있는 모습.

한편 고상돈의 등반 성공으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나라가 되었고,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그를 비롯한 대원들을 모두 청와대로 초청해 체육훈장을 걸어 주고 격려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고상돈은 청주에서 산악반 활동을 시작, 서른 살의 나이에 에베레스트 원정길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에베레스트 정복은 대한민국 산악계의 최대 숙원이었다.

고상돈은 에베레스트로 떠나기 전에 내 금시계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니 혹시 죽게 되면 꼭 시신에서 시계를 찾아다 어머니께 전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드디어 1977915. 1차 공격조가 정상 100m 아래에서 눈보라 때문에 발길을 돌리고 고상돈이 2차 공격조로 투입, 고상돈은 원정대의 막내였지만 튼튼한 체력과 등반 기술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가 정상을 향해 출발하고 9시간 가까이 흐르고 나서 마침내 고상돈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전해졌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 이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 전체가 기뻐했다.

 

고상수高庠秀1917~?. 한경면 금등리에서 태어나 제주농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신고산업주식회사 사장, 선교온천회관 대표, 재일본 제농동창회장, 제주개발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고서흥을 기리는 공덕비.
고서흥을 기리는 공덕비.

고서흥高瑞興1823(순조23)~1899(광무3), 공익 자선가. 본관은 제주, 제주시 건입리<건들-> 고진봉高振鳳의 아들이다. 1886(고종23) 3월 무과에 급제, 그는 곡식 3백 섬을 내놓아 석수와 인부의 비용으로 충당,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민들은 공덕을 기리어 이 언덕을 공덕동산이라고 명명하였다. 비석 상부에 고서흥高瑞興이라 한자로 쓰고 그 하부에 연출사재捐出私財 공석치로攻石治路라 하고 오른쪽에는 세운 연도를 썼으니 1877(고종14) 2월이다.

현 건입동사무소 앞에서 약 20m 떨어진 공덕동산동남쪽 길가 바위에 새겨진 것이다.

고석구高錫九1854(철종5)~1939. 항일운동가, 문인, 자는 경주卿疇, 호는 후백와後栢窩 또는 모송재慕松齋, 제주 오라동<오라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집의계集義契 12의사義士 중의 한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충직하거 근검하여 어진 이를 벗하기를 좋아하였다. 옥사屋社 후에는 왜제倭制에 일체 불복하여 일제의 의복, 음식, 생활용구를 쓰지 않고 왜관에 납세도 거절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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