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그린치 신부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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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중 논설위원

“나는 편히 지내기 위해 신부가 된 게 아닙니다. 나는 한국에 거름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나는 목축을 통해 제주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눈을 감을 때까지 이시돌목장을 통해 주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1954년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사제로 제주에 온 뒤 복음 전파와 주민 자립의 기적을 일군 맥그린치 신부의 살아생전 일성이다.

당시 제주는 한국전쟁과 4·3 사건을 거치며 물질적으로 빈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한 상태였다.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의 가난을 타개할 대책으로 성이시돌목장을 설립, 척박한 중산간을 경작하고 새로운 축산기술을 전파했다. 이때부터 ‘푸른 눈의 돼지 신부님’이란 애칭을 얻었다.

▲그는 모국 아일랜드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땅 제주에 와서 많은 기적을 일궈냈다. 한국어가 유창할 뿐 아니라 ‘임피제’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제주와 도민을 사랑했다.

도민 자립을 위해 양돈산업이 필요하다 여겨 육지에서 씨돼지 요크셔 한마리를 들여왔다. 훗날 연간 3만마리의 돼지를 생산하는 제주목축업의 계기가 됐다. 사랑 실천의 표상은 그뿐이 아니다. 제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과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를 연이어 기획했다. 그 수익금으로 요양원과 유치원, 노인대학 등을 운영하며 주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마지막까지 가난한 병자도 존엄하게 생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며 호스피스병원에 심혈을 쏟았다. 지금도 무료로 운영돼 약자들에게 안식처가 되고 있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 같은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과 고국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제주도 명예도민과 자랑스러운 제주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림주민들도 2014년 ‘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켜 한평생 약자 위해 살아온 뜻을 기리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맥그린치 신부가 지난 23일 90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제주에 정착한 삶이 어느덧 65개 성상이다. 이제 육신은 떠나지만 늘 평화의 그늘을 드리웠던 제주의 큰 나무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평전 발간 기념식 때도 성이시돌호스피스병원 운영이 어렵다며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남아 있는 이들이 그 숙제를 거둬 해결해야 할 때다.

신부님, 모든 짐을 훌훌 털고 고이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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