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신보
  • 승인 201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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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영 수필가

꽃의 계절인 4월입니다.

저는 왜 이 4월만 되면 눈앞이 자꾸 흐려지는 걸까요.

샛노란 유채꽃을 보고 있으면 억눌렸던 민초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인 듯 가슴이 아리고, 툭 떨어지는 빨간 동백에선 슬픔이 묻어납니다. 이제 산도 강도 일곱 구비를 훌쩍 넘어섰건만 마음 곳간에 저장된 기억들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뜻 모를 슬픔에 눈시울이 젖습니다.

제 손녀딸은 이제 일곱 살입니다. 팔랑거리며 유치원에 다니는 티 없이 맑고 고운 아이를 볼 때면 저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을까, 유년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게 됩니다.

1948년 제 나이 일곱 살 무렵입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11월의 첫 일요일 아침. 그날 우리 집은 산사람들(무장대)에 의해 가재도구 하나 건질 새 없이 화마로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유리창을 뚫고 쏘아대는 총탄을 피해 어머니와 언니, 작은 오빠와 저는 겁에 질린 채 몇 백 미터 아래 동네 대밭으로 황급히 피신해야 했습니다. 경황없어 식구들은 모두 신발도 못 신은 맨발인 채였습니다.

위로 오빠 둘은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였고 아버지 직장도 서울이었기에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삼남매뿐이었습니다. 유년 시절의 기억들은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4·3 70주년이라니 세월 참 빠릅니다.

우리 가족은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에게는 재산을 잃었고, 1950년 7월, 군인들에게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홉 살,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당시 국가 위정자들은 국민을 보호한 게 아니라 공권력을 앞세워 무고한 제 아버지와 죄없는 양민들을 제주항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아버지 나이 마흔 네 살, 막내아들보다도 더 어렸을 때였지요.

하루아침 멀쩡했던 집이 불에 타버리자 부엌도 없는 남의 집 쪽방에서 피난살이 하듯 살아야 했던 식구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어머니는 불면 날아 갈듯 병약한 저를 보며 놀라서 생긴 병이라고 걱정을 달고 살았습니다.

당시 서귀면장이셨던 아버지는 한 고을의 수장이었습니다. 4·3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면민들을 보살피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6.25 전란 중이라 제주에 주둔한 군인들의 억압이 무척 심할 때여서 주민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책임져야 했던 당신의 고충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던 7월 어느 날, 아버지는 출근한 뒤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유난히 울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까마귀가 울어댈까’ 하며 다녀오겠다던 아버지는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제주 ‘주정 공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두 아들 소식을 물으셨습니다. 행방을 모르겠다는 어머니의 답에 아버지 눈에선 눈물이 맺혔다고 합니다. 당신이 가실 것을 이미 감지 하셨을까요. 다음날도 어머니는 면회를 갔습니다. 하지만 옥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지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던 시절, 제주에 주둔했던 해병대가 아버지를 끌고 가서 재판도 없이 제주 앞바다에 수장시켜버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을까요. 시신도 찾을 수 없게 왜 하필 바다에. 아버지는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요.

아버지는 해방 후 ‘독립촉성 국민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특채되어 제주경찰청 보안과장으로 근무하셨습니다. 48년 9월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경찰직을 사표내고 서울로 상경해 반민특위 멤버가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 추천으로 ‘반민 특위 황해·제주지부 사무국장 겸 조사관’으로 재직하셨다고 합니다.

서귀포 경찰서장이던 김호겸金浩謙(81·서울시 은평구 역촌 1동)씨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증언 했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내용입니다.

“강○○면장은 소위 ‘괘씸죄’로 희생된 겁니다. 해병대는 자신들의 부식 마련을 위해 강 면장에게 ‘한 시간 내로 소 몇 마리, 고사리 몇 백관 준비하라’는 식으로 요구하며 민폐를 끼쳤습니다. 강 면장이 이를 호락호락 순응하지 않자 앙심을 품은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일곱 번이나 강산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잊을 만도 하련만 메어지는 슬픔은 더해만 갑니다.

지난 4월 1일, 작은오빠 내외와 함께 4·3 평화 공원을 다녀왔습니다. 행불자 비석이 놓여있는 아버지 묘비 앞에서 참배하며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월의 꽃들은 저리도 고운데…

아버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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