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빈(吳廷賓)·오흥태(吳興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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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논설위원

제주의 옛 인물에 대한 무지함은 제주인물대사전(김찬흡 편저)으로 깨우치고 있다. 오정빈(吳廷賓)과 오흥태(吳興泰)도 마찬가지다.

오정빈(吳廷賓·1663~1711)은 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으로 예조좌랑과 전라도 만경현령을 지냈다. 정6품으로 성균관 유생을 가르쳤던 고홍진(高弘進)의 외손이다.

1689년부터 정의현에 유배된 전 호조판서 김진구로부터 고만첨(1672~1730·고홍진의 증손)과 함께 글을 배웠다. 1706년(숙종 32) 제주순무어사 이해조가 내도해 오정빈, 고만첨을 시취(試取·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했으며, 1707년 문과에 나란히 급제했다. 오정빈과 고만첨은 정의현 최초 문과 급제자다.

그 해 제주로 유배 온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전 이조판서)은 부친의 제자인 오정빈과 고만첨의 급제 소식을 듣고 모진 유배생활에도 기쁨에 젖어 들었다. 그의 시 ‘적거감회(謫居感懷)’에는 ‘山南佳士有吳高(산남의 아름다운 선비 오와 고는)/龍榜今年竝折號(올해 문과에 올라 함께 이름 날렸네)’라 하였다. 정의현 사람들은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오흥태(吳興泰·1700~미상)는 성산읍 난산리 출신으로,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킨 의사(義士)다. 1728년(영조4) 이인좌, 정희량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의현을 중심으로 창의격문(倡義檄文·의병을 모으기 위한 격문)을 삼읍에 돌려 의병을 모집했다. 마침 반란이 진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병을 해산했다. 이에 ‘오 의사(吳義士)’라고 불렀다.

1794년(정조18) 순무어사 심낙수가 내도, 오 의사의 의거를 듣고 조정에 보고하니 정표(旌表·의로운 행실을 세상에 널리 알림)되었다. 창의격문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됐다. 이어 1805년(철종1) 제주목사 장인식이 정의서당 구내에 오흥태를 향사토록 의사묘(義士廟)를 건립했다. 이 사당은 그 후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됐다.

▲제주도 문화재위원회가 최근 ‘오정빈 묘역’과 ‘오흥태 비’를 제주도향토유형유산 제23, 24호로 지정했다.

오정빈 묘역은 부인 강씨와 합장묘로 고만첨이 쓴 비문과 분묘 양식이 향토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녔다고 했다. 오흥태 비는 금석문 연구와 18세기 제주도의 인물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 덕분에 제주가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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