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암탉이 울어야 새벽이 오고, 개명사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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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겸, 성균관 교수…공맹지도 헌신
고성규, 조부부터 3대 대정현감
고성림, 전남 곡성 교육장
고성주, 道 최초 현대 서적상 ‘영주서관’ 운영
고성중, 제주도의회 부의장 역임
고세진, 건설업서 대성…국회의원 당선
고수선, 3·1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
제주여청 창립…여성권리 향상 앞장
가파도 청보리밭을 걷고 있는 방문객들의 모습. 가파도는 흑우를 길러 조정에 진상하던 국립 목장이었다. 사회사업가 고수선의 고향이기도 하다.
가파도 청보리밭을 걷고 있는 방문객들의 모습. 가파도는 흑우를 길러 조정에 진상하던 국립 목장이었다. 사회사업가 고수선의 고향이기도 하다.

고성겸高性謙1856(철종7)~1899(광무3), 문신. 성균관 교수, 자는 원위元撝, 호는 능봉菱峰, 본관은 제주이며 제주시 오라리<오라위>에서 고응식高應植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고성겸의 어머니는 남편 사후 6개월 만에 아들을 낳아 애지중지 잘 키웠다. 고성겸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아버지의 얼굴도 못보고 효도마저 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어머니 홍씨에게 여쭈어 부묘를 훼철해 선고先考의 유해를 배면한 후 개장, 추상追喪으로 3년을 모시니 모두 대효大孝라 일컬었다.

고성겸은 성장하면서 조천리의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의 문하에서 많은 글을 배우고, 호남의 성리학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을 사사하여 시예춘추詩禮春秋의 뜻과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원리를 탐구했다.

향시鄕試를 거쳐 1896(건양1) 성균관 재생齋生으로 선발되고 1897(광무1)에 성균관 경학과經學科 유생 시험에 응시, 19명이 뽑힐 때 합격되었다.

이 시험의 상시관上試官은 고종 황제이며 중시관은 서상봉徐相鳳 성균관장 등이 임석한 앞에서 실시돼, 고성겸은 삼상三上의 영광된 합격, 같은 해 105일에 성균관 교수(판임관 6)로 뽑혀 문명을 장안에 과시했다.

고성겸의 의리의 정대함, 문사文辭의 순미함, 필법의 단아함이 성균관장 서상봉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능봉은 공맹지도孔孟之道에 헌신하더니 죽어 연동 남쪽 방선로訪仙路에 안장됐다. 죽암 고순흠高順欽(1883-1977)은 그의 아들로, 무정부주의 항일활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필자의 변=필자는 평생 죽암 고순흠을 탐색해 왔다. 그의 묘를 찾아 4, 5 차례나 성묘를 한 적이 있다. 유고로는 능봉집菱峰集’ 25편이 있는데 아들 고순흠의 사후 일본에 사는 손자가 가져갔다. 이 책은 빨리 환원되어 능봉을 재조명하는 자료로 활용됐으면 한다.

 

제주시 오라리에 있는 고성겸의 묘비
제주시 오라리에 있는 고성겸의 묘비

고성규高性奎1810(순조10)~1872(고종9), 무신. 헌종 때의 대정현감. ‘제주-성안에서 태어나 무과에 합격했다.

그의 조부 고한조高漢祚·부친 고창빈高昌彬과 더불어 3대에 걸쳐 대정현감을 지냈으며 또 당대 부호로 유명하다. 그는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1841(헌종7) 강계우姜繼遇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6월에 떠났다. 백성들은 그에 대한 휼민선정비를 세웠다.

고성림高性林1919(일제강점기)~?, 전남 곡성谷城 교육장, 고경일高景一의 장남, 애월읍 곽지리<답단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분발하여 성품이 곱고 성적이 뛰어나자 세라-데츠오<世良鐵男> 교장의 배려로 학교 급사로 근무, 교장의 특별지도로 여가에 초등학교 교사자격 검정시험을 준비, 4년제 졸업 학력으로 노력 끝에 합격했다.

광복된 후 전남 곡성谷城 교육장까지 지낸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다.

당시의 실정으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제주와 멀리 떨어진 전남 곡성군 관내 교사로 발령, 우수교사로 인정받았다.

고성주高性柱1880(고종12)~?(분단시대), 선비. 서점 경영. 제주시 삼양동<-> 태생으로 자는 선숙善淑, 호는 앙산仰山. 경학과經學科 초시初試에 급제, 학부學部의 교원敎員이 되었다. 190811월 학부(學部·문교부) 편찬 교과용도서 발매권을 허가받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남문로 입구 2도동에 영주서관瀛州書館을 개업하니 이곳이 최초로 현대적인 서적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성중高成重1921?, 제주도의원, 성산읍 성산리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1212일 제3대 제주도의원 선거에 남제주군 제6선거구에서 출마, 당선돼 부의장을 역임했다.

 

고세진高世鎭1933(일제강점기)~1996, 분단시대의 정치가, 국회의원. 사업가. 호는 효담孝潭. 전라남도 담양군 태생. 고세진은 전북 순창농고를 졸업하고 제주도로 들어와 건설 업체의 임직원으로 경험을 쌓고, 1967년부터 서해瑞海건설 사장으로 기업경영에 성공했다. 그는 대한건설협회 제주도지부장, 제주상공회의소 회장, 청원심사위원장과 명륜明倫학원 관선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시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 후 여당인 민정당民正黨에 입당, 국회에서 내무분과위원이었다.

그는 제주대학 발전과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1995년 제주대학교로부터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수선高守善()1898(광무2)~1989, 상해 임정의 군자금軍資金 송금활동. 사회사업가. 호는 우인又忍, 혹은 우당又堂. 고석조高錫祚와 오영원의 딸.

고수선은 대정읍 가파도加波島에서 태어났다. 가파도<겔파->는 본시 흑우를 길러 조정에 진상하던 국립 목장이었다.

고수선은 1916년 경기도 수원水原에 있는 권업勸業모범장 여자잠업蠶業강습소의 1년 과정을 제6기로 졸업했다.

1919년 여성 교육 명문인 경성京城여고보 부설 사범과師範科에 들어갔으며, 3·1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동년 35일 고수선은 신경우申敬雨와 함께 머리띠 2천개를 만들어 박규훈朴圭壎(제주)에게 전달해 활용하게 했고, 독립군 자금 370원을 모금해 박정식朴偵植 편에 송금했으나 탄로났다. 만세시위를 모의했다는 혐의 아래 1922년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수선은 신진 여성들로서 모임을 가질 필요가 절실하다 생각해 최정숙崔貞淑, 강평국姜平國 등 여청女靑 핵심 간부를 이끌어 지도에 임했다.

192512월 제주여청女靑 창립, 인텔리 여성 80명으로 구성, 이 여청女靑의 초대 회장으로 피선됐다. 후일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 전신)에 합격되고 1928년 졸업, 개성에 있는 남성의원南星醫院 소아과에 근무했다.

고수선은 나이 30에 경성의전 출신 김태민金泰玟과 만나 만혼晩婚으로 고향 제주를 찾았다. 부부는 조천에 장춘의원長春醫院을 개업했다.

1933년 서문통에 공익상회共益商會를 개설해 면포, 곡물, 식료품, 잡화 등을 판매했다.

조국 광복이 되자 대한여자국민당 논산지구당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1년에 고향 제주로 돌아와 운주당運籌堂 터전에 살면서 건국 운동, 여성 운동, 사회 운동에 앞장섰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남녀평등 사상을 불어넣어야 하겠다는 일념에서 입후보했다. 다른 한 입후보자가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쳤다. 뒤에 등단한 고여사高女史암탉이 울어야 새벽이 오는 법이오, 또 개명開明사회가 열리는 법이다.”고 일갈했다.

제주모자원母子院과 홍익보육원弘益保育院을 개설 운영하면서 대한부인회 제주도지회장, 한국예총·한국국악협회·여성저축생활 제주도지부장, 대한적십자 제주도지사 부지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에게 1980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전수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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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흠 2019-02-12 20:36:33
능봉집 일부는 아마 국내에 있을것입니다.

홍길둥 2019-01-10 03:04:01
뭣이 어째? 암탉이 울어야 새벽이 온다고? 뭔 개솔이야~
암탉이 새벽에 우는것 봤어? 수탉이 울지? 바보야! 어휴~멍청한xx
조카크레파스 십팔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