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이 있었고 지조를 지켰다…제주서 유배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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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번, 조선시대 의금부도사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 ‘사사’
‘기묘사화’ 연루…직위 파직
대정현 정착…후학 양성 앞장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신물에 있는 의금부도사 이세번 무덤의 모습. 봉분 주변에는 방형의 산담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신물에 있는 의금부도사 이세번 무덤의 모습. 봉분 주변에는 방형의 산담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기묘사화에 연루된 이세번

조광조는 제주와 관련이 밀접하다.

기묘사화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충암(沖菴) 김정(金淨)은 기묘년(1519)에 금산(錦山)으로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이배되고, 경진년(1920)에 국문을 받고 제주에 안치되었는데, 신사년(1521)에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죽었다.

본관이 제주이고 문인 서화가로 이름을 날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은 조광조를 구하려고 상소문 첫 머리에 이름을 올렸다가 파직돼 고향인 능주의 중조신(中條山) 아래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칩거했다. 이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는 당시 조광조의 유배지이기도 하여, 양팽손은 조광조를 매일 만나면서 경사(經史)를 논했다고 한다.

양팽손은 조광조보다 6살이나 어리지만 뜻을 함께한 벗으로서 조광조가 유배 후 1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신을 손수 수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49년이 지난 정미년(丁未年:현종 8, 1667), 더 세월이 흐르면 조광조의 유허지(遺墟址)를 잃어버릴까 염려한 능주목사 민여로는 우암 송시열에게 유허비문을 부탁하니 물은 차마 이를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이를 버리지 못 한다는 감회 속에서 우암은 조광조를 기리는 비문을 지었다.

의금부도사 이세번(李世藩·1482~1526)도 기묘사화에 연루된 한 사람이다.

이세번의 호는 백산(白山), 본관은 고부(古阜)이다. 제주 고부 이씨 입도시조가 된다.

이세번에 대한 기록

이세번에 대한 기록은 극히 미미하고 저서 또한 전해오지 않아 정확한 그의 행적은 알기 어렵다. 다만 학포집(學圃集)’, ‘기묘당금록(己卯黨禁錄)’에 기묘사화에 연루된 131명 중 이세번에 대해서는 이세번, 의금부도사에서 파직되었다(李世藩, 以都事罷斥)’라는 간략한 기록만 보인다.

또 작자 미상의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별과시 천거인(別科時 薦擧人)’, ‘경외관동천인(京外官同薦人)’ 78명 중 이세번에 대한 기록에서 전 도사(都事) 이세번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前都事 李世藩 有學行操)’고 했다.

별과에 천거된 사람은 모두 120명이었으나 등용된 사람은 모두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지만 굳이 천거되었던 78명을 모두 기록한 것은 그들의 학식과 행실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또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1549~1607)지퇴당집(知退堂集)’, ‘황토기사(黃兎記事下)’, ‘별과에 천거된 사람은 모두 120인인데 등용된 사람은 28인이며, 남은 사람은 92인이다(別科被薦凡一百二十人·登科二十八· 餘九十人)’라고 했고, 천거인 가운데 도사 이세번은 학행이 있었고 지조를 지켰다(都事 李世藩 有學行操守)’라는 기록이 전해온다.

은봉전서(隱奉全書)’, ‘기묘유적(己卯遺蹟)’에도 기묘사화의 관련 인물들에 대해 죄의 경중(輕重)을 따라 처벌하고 있다.

도사(都事) 이세번(李世藩)’ 보외(補外)’, 즉 좌천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은 모두 159인에 이른다. 이들은 1519(중종 14) 기묘사화부터 1521(중종 16)의 신사사화(辛巳士禍)까지 화를 당한 사람들이다.

김봉현(金奉鉉)제주유인전(濟州流人傳)’에는, ‘이세번은 조광조와 더불어 김굉필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투철했다. ()1514(중종 8)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6), 의금부도사(5)가 되었다. 이세번은 이렇다 할 죄명도 없이 기묘사화 이듬해인 1520(중종 15)에 제주도 대정현 둔개(屯浦·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 장형(杖刑) 후 유배되었다고 한다. 후학 양성에 힘 쓰던 그는 유배 7년이 되던 해 병상에 눕게 되어 1526(중종 21)에 운명했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조광조 유배지.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조광조 유배지.

개혁파에 대한 보복, ‘기묘사화

조선의 역사에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같이 회자되는 선비도 드물다.

부패한 권력층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냥했다가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에 이른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이상 국가를 꿈꿨던 조선의 개혁 정치가였다.

기묘사화는 중종반정과 관련이 매우 깊다. 조선의 스물일곱 명의 임금 가운데 왕위에서 쫓겨나서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복권이 안 된 두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고는 광기 어린 폭정을 행했던 연산군. 이를 참다못한 신하들의 거사로 1506년 연산군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그 최후를 맞는다.

마침내 크고도 깊었던 연산군 폭정의 상처는 잃어버린 유교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성리학을 중흥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 대표적인 신진사류(新進士類)로 등장한 인물이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조광조였다.

1515(중종 10) 왕비 책립을 둘러싸고 대신들 간의 알력이 시작되던 해에 성균관 유생 200명의 추천을 받고 관직에 오른 조광조의 개혁은 중종의 신임을 받게 될 때부터 이미 기묘사화의 싹은 자라고 있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여 중국 고대 하((() 시대 왕도정치를 이상적 모델로 삼고, 먼저 왕도정치를 펴기 위한 기초로서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1519년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였다.

현량과 설치는 개국 이래 그 간의 과거제도가 권력층의 독식으로 폐해가 많았던 것에 대한 개혁 조치였다.

또 조광조는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던 기구인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미신타파에 힘썼으며, 향촌 사회의 안정을 위해 향약을 널리 시행하여 훈구대신들의 수탈 기반인 경재소와 유향소(留鄕所)를 없애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부패한 훈구대신들에 대한 단호한 도전이었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임과 동시에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을 신조로 삼고 있었던 조광조가 겨눈 것은 훈구대신들이 공훈(功勳)으로 누리는 여러 특혜 중 경제적인 특권이었다.

1519(중종 14) 조광조는 중종반정에 공이 없는 대신들 76명에 대해 반정공신위훈삭제(反正功臣僞勳削除)’를 감행해 그들의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비를 환수했다. 이 숫자는 전체 117명의 공신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하는 숫자로 당연히 정치적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중종의 신임 아래 조광조의 개혁 정치에 불안감을 느낀 훈구파 대신들은 눈에 가시인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모략을 꾸미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남양군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를 시켜 의 파자(破字)나뭇잎에 감즙을 발라 개미가 갉아먹게 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그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여 조광조를 의심케 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그 죄를 바로잡아 달라는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의 상소문을 보고 급기야 조광조 일파를 단죄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이것이 기묘사화(1519)이다.

이에 성균관 유생 1천 명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면서 처벌에 반대했다. 이때 대사헌 조광조와 같이 희생된 사람들을 일러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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