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재심 청구 ‘군집행지휘서’ 직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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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당시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한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청구한 재심 사건에 대한 심리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변호인 측에 의해 ‘군집행지휘서(軍執行指揮書)’가 재판부에 제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는 재심 청구 사건에 ‘원심 판결문’이 없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유죄의 확정판결’을 다시 판단해달라는 재심 청구에는 원심 판결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제주 4·3 당시 군법회의는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서 판결문을 작성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국가기록원에 소장됐다가 근 70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드러난 군집행지휘서는 재심 청구 재판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군집행지휘서는 4·3 당시 제주군 책임자인 함병선 수도경비사령부 보병 제2연대장이 대구형무소장에게 보낸 공문서다. 즉 당시 수형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됐으니 형무소에 수감을 명령한 것이다. 실제로 이 지휘서에는 수형인의 이름과 ‘右者 別紙 軍法會議 命令과 如히 裁判 確定 되였아오니 즉시 執行함을 要 함’이라고 명시됐다. 또 판결 언도일(단기 4282년 7월 2일)과 죄명(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죄, 33조-간첩죄 위반 범죄사실), 군법회의 유형(고등군법회의), 판결(징역 15년) 등이 상세히 기록됐다.

더욱이 이 지휘서는 ‘단기 4282년(서기 1949년) 국방장관 命에 의하여 육군대령 함병선, 형무소장 貴下’라고 기록되면서 4·3 수형인들에 대한 모든 집행이 국방부 지휘하에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국방부 또는 그 이상의 지휘체계가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4·3도민연대 측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4·3 수형인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에 진행된 군사재판을 거쳐 인천·대전·대구 등 전국 형무소 14곳에 나눠 수감된 2530명을 말한다. 이들에 대한 공식 기록은 ‘수형인 명부’뿐이다. 재판부는 이런 점을 고려해 군집행지휘서의 의미와 가치를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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