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기다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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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동창생 어머님 상에 조문했다. 어림짐작하다 상주에게 망인의 연치를 물었더니, 3·1운동이 일어난 기미년이 생년이라 한다. 향년 100세다. 교장으로 정년퇴임해 십년 넘은 상주가 존경스럽다. 어간 노모님을 섬겨 온 그의 덕행을 우러르게 된 것이다. 어려움이 많았을 테다. 정성이 지극하지 않으면 어르신을 모시기 힘들다.

장례식장을 나오며, 생존했으면 백 서넛이 되실 부모님 생각에 울컥했다. 두 분 다 고희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셨다.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크다. 뉘우침은 시간이 갈수록 한(恨)을 키운다. 그때는 갓 가정을 가져 형편이 아니었다지만, 그건 구실이고 변명이고 군색한 합리화일 뿐이다.

교단에서 국어시간에 한문 구절 하나를 판서해 설명하고 나서, 교실을 나오며 눈시울을 붉혔던 적이 있다.

‘樹欲靜而 風不止(수욕정이 풍부지)’ 하고, 子欲養而 親不待라(자욕양이 친부대)라, 〈韓詩外傳〉에 나온다. ‘나무는 조용히 하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부양하려 하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 한 대목. 부모는 세월 따라 다시 회향(回向)할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고 마니, 살아생전에 효도하라 함이다. 온당한 말이다.

효(孝)는 백행의 근본이다. 덕의 근본을 못 이룬 사람이 어찌 교단에 떳떳이 설 수 있었던지 부끄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불효자다. 어찌하면 좋은가. 불효로 얻은 마음 걸림이 어느새 그림자가 돼 평생 뒤를 따라다니고 있으니. 한 발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아 떼어낼 수 없는 그 그림자에 밟혀 노상 가슴 아리다.

웬 따분한 소리냐 하겠으나 옛 얘기 하나 하려 한다.

조선시대에 시묘(侍墓)하는 풍습이 있었다. 부모상을 당해 무덤을 이룬 뒤, 그 서쪽에 여막(廬幕, 움집)을 짓고 상주가 3년 동안을 살았다. 탈상할 때까지 머물면서 묘에 시중을 들었다.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이었다.

대충하지 않았다 한다. 생시처럼 조석으로 문안드리고 간단한 상식을 올렸다. 부모의 죽음이 곧 자신의 불효에서 비롯했다고 죄인을 자처해 수염과 머리카락도 깎지 않았다. 그게 부모에 대한 자식의 예절이자 도리라 여겼던 것이다.

나 또한 그렇거니와 불쑥 시묘를 꺼내니 젊은이들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예전같이 하라 함이 아니다. 세상이 바뀌어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효에 대한 인식만은 소중한 덕목으로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효는 가족에게 권장돼 온 가장 큰 덕목이다. 그것은 부모를 정성껏 섬긴다는 경애의 감정에 토대한다. 생명의 근원인 부모에 대한 공경과 보은의 출발점이 효도다.

나이 들어서인지 둘만 사는 집이 고적하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 마주 쳐다보며 객쩍게 웃는다. 외로움에 눈이 촉촉이 젖어 있다. 사나흘이 멀다고 걸려오던 아이들 전화가 없으면 조바심이 인다. 왜일까 하고 마음이 아이들 집으로 달려가곤 한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랴. 마음뿐, 무엇 하나 힘이 되지 못하니 심사 어찌 편할까.

어버이날이 다가오니 마음 스산하다. 먼 산에 비가 잦아 땅이 질퍽하겠으나, 부모님 산소에 성묘하려 한다. 차가 못 들어가는 길엔 목 긴 신발을 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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