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대표 항일운동가…‘박열’과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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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학, 고산학원 상무이사 역임…고순, 장애 딛고 생원시 합격…시인 활동
고순흠, 능봉의 아들로 3·1운동 등 참여…해녀조합·여공 보호연맹 주도
작업 도구를 갖춘 두 해녀가 갯바위에서 활짝 웃고 있다. 죽암 고순흠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해녀의 복리 증진을 위해 제주해녀조합 설립 운동에 참여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작업 도구를 갖춘 두 해녀가 갯바위에서 활짝 웃고 있다. 죽암 고순흠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해녀의 복리 증진을 위해 제주해녀조합 설립 운동에 참여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수학高壽學1911~1990. 한경면 고산리에 출생하여 고산 보창의숙을 졸업. 1932년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55년 고산리 통합 이장을 지냈다. 학교법인 고산학원 상무이사를 역임하였다.

고순高淳생몰년 미상, 성종 때의 귀머거리 시인. 자는 희지熙之 또 태진太眞, 또 진진眞眞이라고 하며 호는 망인妄人.

1478(성종9) 조서詔書에 응하여 상소한 것이 망령된 이름을 알려졌다고 자호自號로 망인이라 한 것이다.

첨지중추 고득중高得中의 아들로 태어나 독실한 성품이다.

노장老莊에 심취, 세속에 얽매지 않았다.

1488(성종1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귀머거리이면서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안응세安應世, 신영희辛永禧 등과 어울렸다. 1910(융희4) 819일 궁내부대신 민병석閔炳奭이 상주해, 자헌대부·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효의孝義로 내렸고 명시전서에 수록됐다.

고순흠高順欽1893(고종30)~1977, 무정부주의의 항일활동.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岩.

조천리의 능봉菱峰 고성겸高性謙(오라리)의 아들이다. 19143월 경성전수京城專修학교(서울법대 전신)를 졸업했다.

죽암은 조숙하여 이미 7세에 글씨는 신필神筆의 지경이라 9살에는 한문으로 글을 지으니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향리에서 한문을 익혔다.

19193·1 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죽암은 김규열金奎烈, 황종화黃鍾和, 이영봉李永鳳, 최익무崔翼武 등과 함께 임정臨政으로부터 일제의 관공리인 동포에게’, ‘포고 제1, 남녀 학생에게’, ‘포고 제2,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등을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전달받아 국내에 배포했다.

1920년 조선 노동공제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서무 책임자가 되고 1921년 제3회 정기총회에서 김명식金明植(조천)이 회장이 되고 그는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19월 조선통신중학관을 개설, 학감學監에 취임하여 통신 중학강의록을 발행, 독학자로 하여금 실력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죽암은 제주 해녀조합 설립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조선 노동공제회 내부의 볼세비키파에 반대해 이들을 폭행하고 회관 간판과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이 사건으로 19228월 검거되어 2주간 구금되었다.

동년 6월 조선무산자 사회연맹을 결성하고 그의 주창으로 천왕사天王寺 공회당에서 조선인 언론 집회 탄압 탄핵 대회를 개최했다.

1923년 이래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노동 운동 열기가 대두, 각지에서 노동 운동 단체의 창립이 활발해지자 그는 오사카 노동동맹회를 통해 조선인 여공보호연맹을 조직하였다. 고순흠의 운동 세력은 점차 확산됐고 노동 운동과 사상 계몽을 함에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928년 말경 죽암은 제주 항해조합과 기업 동맹 기선부를 설립, 일본 기선회사의 횡포에 대처하면서 제주와 오사카 간의 독립 항로를 개설,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으나 일제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공산주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 무정부주의 운동이 퇴조되면서 그의 항일 활동도 점차 후퇴되어 신진회新進會를 조직, 오직 사상운동에만 전념했다.

 

고순흠이 김순겸에게 써준 자작시.
고순흠이 김순겸에게 써준 자작시.

19373월 조선서도연구회를 마련, 추사체秋史體, 창암체蒼嵒體 등 민족 서체 보급에 힘썼는데 한시에도 능했으며 서필 수준은 대단하여 김문준의 묘표, 해강海岡 김운배金沄培의 묘비, 김시성金時成의 묘비, 김시숙金時淑()의 묘비 등 항일 인사의 비문은 모두 그의 글씨다. 조국이 해방되어 이념이 양극화되기 이전인 19462월 재일본 조선인연맹 대표자로서 민주주의 민족전선결성대회에 참석했다.

1946103일 창단 대회를 개최, 단장에 박열朴烈(문경)을 선출, 또 고순흠은 중앙 총본부 의장에 피선되었다. 또 이 무렵 세기世紀신문 사장에 취임, 1947101일 민단民團 부단장에 피선되고 연임해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을 중앙청 앞에서 거행하게 되자 당시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민단 단장 박열·부단장 고순흠은 건국 축전 참가 경축사절단을 이끌고 단상에 오르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및 미 극동 사령관 맥아더 원수元帥를 비롯하여 국내외 동포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편 1950년 여름 박열과 고순흠은 재일교포의 동향을 조국의 동포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마침 6·25 동란이 발생하여 박열은 공산군에게 납북拉北당하고 죽암은 간신히 한강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1963년 귀국해 서예 활동에 몰두, 제주·부산에서 작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19771128일 오후 730분 서울 화곡동禾谷洞에서 사망하자 그곳에 묻혔다가 대전의 국립묘지 순국선열 묘역으로 이장했다.

만년의 반려자 민혜경閔惠璟 여사와 문하생 서예가 김순겸金順謙이 비문을 쓰고 세워 그 자리에 참배했다. 애국동지 김문준 등 많은 묘갈문을 썼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죽암 고순흠과의 만남=제주일고濟州一高에 재직하던 1960년대 초일 것이다. 제주도립병원 앞쪽 제주남교濟州南校 강당에서 죽암 고순흠(조천)의 서예 강연을 듣고자 찾아갔다. 이미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높은 명성은 듣고 있었던 차였다.

죽암은 문장을 잘 짓고 글씨도 당대의 최고라는 말도 있었다. 한번 얼굴도 보고 싶어 나를 재촉하게 했다. 이미 서예로 유명해진 홍정표洪貞杓(제주-성안), 김순겸金順謙(금성), 문기선文基善(어도) 등 면모도 보였다. 후일 김순겸 댁에서 그를 만나 그의 고고한 성품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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