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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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 농업인·수필가

눈송이 닮은 하얀 감귤꽃 만개하니, 서귀포에 화사한 봄기운 완연하다.

알싸한 꽃향기 자욱한 고샅길 따라 기화요초(琪花瑤草) 폭죽처럼 피어나고,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달뜬 춘흥(春興) 부추긴다. 지금 서귀포 칠십리는, 곳곳마다 봄나들이 인파로 넘실대고 시끌벅적하다.

그렇지만, 실버농부에게 상춘(賞春)의 여유는 요원하다.

제수 마련하느라, 뒷동산 고사리 꺾으며 답청(踏靑) 기분 내 본 몇 시간. 그리고 고사리축제에서 지인들과 막걸리 몇 잔 주고받은 것이, 올봄 나들이의 전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감귤나무 전정으로 시작된 농사일이, 숨 돌릴 틈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전정으로 잘린 가지들 파쇄작업을 끝내니, 나무들 기력회복 위한 영양제와 거름·비료주기, 각종 살균제와 살충제 살포. 거기에다 하우스 감귤나무들에는, 적화(摘花)와 적과(摘果) 작업들이 아이들 방학 숙제처럼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이 모든 작업들이 농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변인들이어서, 그 중 어느 것도 건너뛰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보니, 도통 농장을 벗어날 수 없다. 미상불 올해 상춘곡(賞春曲), 흘러간 옛 노래로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감귤나무들과 더불어 세월을 섞고 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무엇보다, 흙을 만지는 육체노동의 역동적 즐거움 때문이다.

평생을 화이트칼라로 살면서, 블루칼라의 삶을 동경했었다.

와이셔츠와 넥타이 대신, 때 묻은 작업복과 더운 땀을 꿈꾸어 왔다. 월급노동에서 해방되어, 주체적인 삶을 일구는 자영(自營)의 삶을 희구해왔다.

그런데, 정년퇴임으로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

자영 농업인으로서, 노동과 휴식을 스스로 제어하는 워라벨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해 뜨면 농장으로 향하고, 지는 해를 등지고 돌아 오는 초보농부의 삶이 만만치는 않다.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되는 일상의 노동으로, 온 몸이 고달프다. 그래도, 남의 간섭과 시선에서 자유로우니 마음만은 평화롭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포노스(ponos)프락시스(praxsis)’로 구분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노동을 포노스, 자아실현이나 공동체발전을 위한 노동을 프락시스라고 불렀다.

많지는 않지만 연금 덕에, 은퇴 후 고되고 힘든 포노스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다. 대신 자영농부로서의 프락시스를 통해, 자아실현의 즐거움과 함께,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활기찬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가끔 지인들과 수작(酬酌)도 하는데, 연금 받아 술 산다고 연금술사라는 싫지 않은 별명도 덤으로 얻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달콤한 피로가 봄비처럼 내리는 귀갓길. 붉은 노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한다. 죽는 날까지, 건강한 프락시스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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