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책은 주린 사람의 옥수수, 추운 사람의 옷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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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번의 문집 병란에 유실돼…子 이충현, 대정에 남아 훈학 힘써
‘제주 영웅’ 이재수, 고부 이씨 12세손…천주교 교폐에 민중봉기 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지경에 있는 이세번의 아들 이충현 부부 무덤, 이충현은 제주교수가 돼 후학에 힘썼다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지경에 있는 이세번의 아들 이충현 부부 무덤, 이충현은 제주교수가 돼 후학에 힘썼다

1962년 월성(月城) 김종가(金鐘嘉)가 쓴 도사공행장(都事公行狀)’에 의하면, 이세번은 어릴 때부터 매우 특이해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모시면서 훈계를 들어도 기뻐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아 스스로 일과(日課)에 부지런했다.

17~18세에 도에 뜻을 두어 하늘이 나를 미물(微物)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였고,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게 한 것이 행복하다.’라고 생각했다.

이세번은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 이약수(李若水) 등 수백 인과 함께 문을 박차고 나아가 상소를 올리면서 조광조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사람들이 그런 이세번에게 신변의 위태로움을 알리자 군자는 화()도 같이하고 복()은 오래전에 선택되었다고 웃으면서 답했다고 한다.

 

의기(義氣)가 흐르는 고부 이씨

이세번은 유배 와서도 효제충신(孝悌忠信)’ 4자를 거울삼아 고전 읽기를 즐겨 했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서책의 중요성을 비유하건데 주린 사람에게는 옥수수와 같고, 추운 사람에게는 옷감과 같으며, 우울한 사람에게는 악기와 같으니 세상의 도덕과 의리가 책 속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독서를 유독 좋아했던 이세번의 문집이나 문헌이 전하지 않는 것은 모두 병란(兵亂)에 유실(遺失)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학행이 뛰어났던 그의 과거시험의 경력이나 관직(官職), 시문(詩文)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안타까움만 남게 되었다.

이세번의 아버지는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이정(李精)이다. 벽동군은 오늘날 평안북도 벽동읍 지역인데 압록강 연안에 위치한다.

이세번의 부인은 월성(月城) 석씨(昔氏)로 석보함(昔輔咸)의 딸이다. 석씨는 예의와 법도를 갖춘 절조(節操) 있는 여사(女士)였다. 석씨 소생으로 충현(忠賢)과 충효(忠孝)가 있다.

당시 큰 아들 충현은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고 있었다. 이세번이 유배지에서 병으로 위독하자 석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큰 아들은 타계한 아버지를 유배지 가까운 곳인 고산리 자수원(紫水員·신물) 병좌(丙坐)에 소박하게 묻고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귀경(歸京)치 않고 대정에 남아 제주 교수에 임명돼 훈학에 힘썼다.

이충현(李忠賢)의 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 입도 13세인 어모장군(禦侮將軍) 정형창(鄭亨昌)의 딸이다. 어머니 석씨는 서귀포시 중문 회수동에 있는 석굴왓(石洞田)에 묻혔다.

이세번이 학행이 높고 성품이 강개해 의협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부 이씨 후대에서도 검증되고 있다. 제주 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이 장두 이재수이다.

이재수는 조정에서 파견한 봉세관의 학정(虐政)과 권력과 외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의 교폐에 항거해 1901년 신축년에 결연(決然)히 일어난 민중봉기의 주역으로 이세번의 12세손이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신물에 있는 이세번 묘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신물에 있는 이세번 묘비

역사는 강자(强者)가 기술한다

아들을 제주 영웅으로 받들던 이재수의 어머니 송씨의 무덤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봉에 있다. 인성, 안성, 보성리 사람들이 송씨의 무덤과 비석을 세웠다. 제주 4·3과 관련이 있는 이승진도 이세번의 후손이다.

그러나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쓴 이재수의 민중봉기에 대한 역사 기록은 크게 왜곡돼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는 강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기울어가는 조선의 처지가 얼마나 기막힌 위치였는지, 진정 누가 누구를 폭도라 불러야 하는지 프랑스 제국주의의 두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다. “1901년 봄에 벌써 242명의 영세자와 700명의 예비자를 헤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었다. 이 섬(제주)은 유별나게 미신을 섬겼으니 섬을 지배하던 마귀가 보복을 해 왔다. 무속인들은 자기네 손님들이 천주교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천주교를 헐뜯는 상습적인 중상모략을 퍼뜨렸다. 다른 한편으로 서울에서 세전(稅錢:세금) 걷으러 온 봉세관이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폭동의 조짐을 느낀 조심성 많은 봉세관은 황급히 육지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흥분한 백성들은 돌변하여 교우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교우를 뒤쫓았고 교우들은 제주읍에 있던 두 선교사-리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주위로 모였다. 읍성은 폭도들에게 포위당하였다. 성을 방어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관원들은 곧 폭도들과 타협했고 성문을 열게 하였다. 교우들의 학살이 시작되었고, 500명에서 600명이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531일 포티에(Potter) 제독이 보낸 두 척의 프랑스 함선 쉬르프리즈 호와 알루에트 호가 두 선교사를 구하러 왔을 때 관아에 피신해 있던 그들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파리 외방 전교회·2015)

19~20세기 동안 동아시아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각국에서 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재수의 항쟁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점이 너무나 많다. 민중 항쟁의 지도자들이 정부와 협상을 할 때, 정부는 항쟁의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보다는 민중의 지도자들만 최고형으로 다스린다는 사실이 그중 하나다.

항쟁이란 학정(虐政)에 견디다 못해 탐관 모리배의 부패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최후의 저항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늘 민중들의 요구 사항을 제대로 받아드리기는커녕, 항쟁을 일으킨 민중들을 회유하여 우선 급한 불을 끄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회유 후에 보복이라는 지배체제의 민중 운동 탄압은 오늘날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어떤 체제라도 민중의 저항적인 요소는 늘 잠재해 있으며 그것은 주기적으로 모순의 발화점이 된다.

억압받는 민중들이 지속적으로 체제에 대항하기에는 정치적 조건, 경제적인 이유, 이데올로기적 대응의 힘이 너무 약하다.

그러다가 억압의 강도가 높아지고 지배층의 부패가 심해 그 토대가 흔들리게 되면,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항쟁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런 민중항쟁은 실패했을 때 민중의 피해만 늘게 되고, 항쟁이 타협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지배체제의 억압의 강도만 조금 낮출 수 있었을 뿐이었다.

민중항쟁이 완전한 성과를 얻지 못하면 그에 따르는 민중들의 고난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혹 또다시 어떤 사회적인 모순으로 인해 민중항쟁이 일어나더라도 산발적이고 고립된 일시적인 것이 되고, 통상적으로 이전의 민중항쟁과 뚜렷한 관계를 가진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 지배체제에 이득을 주는 것이 된다. 이에 사회학자 이매뉴엘 월러스틴(I. Wallerstein), “역사를 관통하여 전 세계 지배계층이 누린 가장 큰 이점은 반란의 불연속성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이세번 무덤에 석상과 석물이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세번이 유배 온 16세기에는 제주에 무덤 석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족 또한 유배 온 아버지 수발을 위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이세번의 봉분의 크기나 조촐한 산담의 규모가 말해준다. 아들 이충현 부부의 무덤은 아버지 이세번의 무덤 보다 규모가 크지만 형식은 같은 원묘이다. 제주도의 원묘는 17세기까지도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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