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찐 고사리의 추억
살찐 고사리의 추억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조정의, 자유기고가

그 해 오월은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덤불에는 싹이 움트고 이른 찔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스무 가구가 사는 한적한 마을에 봄은 소리 없이 찾아와 고사릴 살찌웠다. 다사로운 봄볕을 맞으며 작은 마을 아낙들은 고사릴 꺾었다.

두 달 전에 일본에서 온 다섯 살 박이 나도 어머님 따라 고사리 밭엘 갔다. 둔덕 넘어 고사리 밭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종달새도 지져댔다. 난 우리말을 모르는 외톨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을 따라 다녔다.

어머님은 덤불을 헤치며 살찐 고사리를 잘도 꺾어냈다. 가시에 손목이 찔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네 아낙들과 고사리를 꺾으러 가면 어머님의 당참은 유별났다. 여느 아낙네보다 고사릴 한 줌이라도 더 꺾었으니까.

그 당참, 그 직성이 어린 세 남매를 데리고 남편 앞서 현해탄을 건넜던 것일까.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제주와 일본에 갈려 살아야 했다. 곧 뒤 따라 오겠다던 아버지와 일본의 형제들은 시국에 발목이 잡혀 제주행 배를 타지 못했다. 그 길로 먼저 제주에온 네 식구는 아버지 없는 삶을 살아야했다. 지난한 세월이었다.

이제 아린 세월이 70년이나 흘렀다. 살찐 고사릴 꺾으시던 어머님 세상 뜬 지도 스무 해를 넘겼다. 1948년 5월, 하염없이 쏟아지는 봄볕은 작은 마을 아낙들을 집에 있게 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들로 나갔다. 들녘엔 봄볕이 자글거리고 살찐 고사리가 지천이었다.

고사리를 꺾으며 동네 아낙들이 말을 걸어와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일본말을 하면 남들이 웃었다. 다섯 살 박이가 무슨 말을 얼마나 했을까마는 나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머님은 내 유일한 통역사였다.

그 때 문 밖을 나서면 어수선한 소문이 언뜻언뜻 들려도 어머님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문은 늘 들쭉날쭉했다. 이 마을에 기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건 봄이 한창 물오를 즈음이었다.

소문은 바람결에 다가왔다. 어디에 방(榜)이 붙여있는 것도 아닌데, 그 해 5월 9일 하룻밤을 집을 비우고 마을을 떠나 있으라했다. 이것이 마을을 지키는 일이라고…, 그 말을 믿고 어머님도 나도 따라 나섰다. 아무도 그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2㎞쯤 떨어진 소나무가 울창한 외딴 곳이 피신처였다.

그 밤엔 봄비가 을씨년스럽게 추적였다. 마을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님은 무엇 때문에 비를 맞으며 몸을 숨겨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밤이 이슥해서야 내일 치러지는 5·10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피신이라는 말이 돌았다.

어머님은 왜 선거를 반대해야 되는지 몰랐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했다. 작은 마을 사람들은 시국이야기는 뒷전이었다. 갓 마흔의 어머님도 열두 살 누님도, 나도 몰랐다. 이것이 어머님과 나의 5·10선거 반대의 시말(始末)이다.

그 길로 작은 마을엔 시나브로 경찰이 들락거렸고 서북청년과 군인도 다녀갔다. 어느 날은 남편 있는 곳을 대라고 총 뿌릴 겨누며 어머님을 윽박지르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머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해 가을 작은 마을은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고, 살찐 고사리를 꺾던 아낙들은 마을을 떠났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