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끔 단어 하나에 가슴이 뛰곤 한다. 많은 말과 글 속에서 불쑥 가슴에 파문을 그리는 단어를 만나면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다보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들의 언어습관이나 어휘선택에 유독 관심이 간다.
오늘은 ‘그냥’에 꽂혔다.
그냥: 1.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 2.그런 모양으로 줄곧 / 3.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
사전에서 찾은 ‘그냥’이다. 단어의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해 놓았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그냥’ 속에는 많은 감정과 생각, 상황이 들어 있다.
친구를 만나러 갔던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들어온다.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왔니?”
“그냥이요.”
덧붙인 말이 없더라도 이 한마디는 충분히 상황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다거나, 친구 관계에 문제가 생겼겠지 하는 정도로 아이 기분을 이해하게 된다. 이럴 때 그냥은 기다림이다. 아들 마음에 난분분한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는 것, 이날의 그냥이다.
하늘이 온통 회색빛으로 멍든 아침이다.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게 쏟아진다. 뒷마당의 빗소리가 심상치 않다. 툭! 툭투둑! 투둑! 투두둑! 한 무더기 수국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하모니, 누구의 작품인지 박자가 절묘하다. 비 듣는 소리에 넋을 놓고 있는데 느닷없이 친구가 고개를 내민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그냥~!”
특별한 말이 필요 없다. 그녀도 나처럼 빗소리에 감정이 출렁였거나, 문득 내가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 그대로 ‘그냥’ 나를 찾은 게다. 친구의 ‘그냥’은 굳이 해석을 하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럴 때 나는 ‘그냥’에서 풀꽃 냄새를 맡는다. 화려하지도 정형적이지도 않은 무구함. 그로인해 언제든 만날 이유를 부여할 수 있는 편안함이 친구의 ‘그냥’이다.
아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 앞에 선다.
“좋은 일 있어?”
“그냥이요.”
아이 마음을 달뜨게 한 무엇이 있지만 딱히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도 감지할 수 있다. 녀석 마음을. 얼마 후에 있을 일에 대한 기대나 설렘이 파동을 만들지 않았을까.
나 역시 종종 ‘그냥’을 소환한다. 논리적인 설명이 곤란할 때나 감정을 숨기고 싶을 때,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거나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할 때 등. 나의 편의에 따라 무심결이든, 의도적이든 불려나온 ‘그냥’은 상황과 감정의 대변자가 된다. 이럴 때 그냥은 만능언어다.
하지만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냥’하고 뭉뚱그려 던진 말은 지레짐작을 낳기도 하고, 상대에 대한 무성의나 귀차니즘으로 비춰져 요지경이 될 때도 있다.
그러면 어떠랴. 그냥은 내게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쉼표 언어인 걸. ‘그냥’하고 몇 번씩 곱씹어 본다. 싱그러운 맛이 난다. 부족한 듯, 서툰 듯 그러면서도 여유롭고 편안하다. 야무지지 않은 말, 그냥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