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50일간 동굴 은신...생존자들 또 '집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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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 큰넓궤 피난처...영화 '지슬'의 무대 되기도
동광리 중산간에 있는 큰넓궤 내부 모습. 군 토벌대의 공격에 대비해 동굴 안에 방어용 돌담을 쌓아 놓았다.
동광리 중산간에 있는 큰넓궤 내부 모습. 군 토벌대의 공격에 대비해 동굴 안에 방어용 돌담을 쌓아 놓았다.

1948년 4·3사건 당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는 다섯 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동광리는 무등이왓(80호), 삼밧구석(45호), 조수궤(10호), 간장리(10호) 등 150여 호가 모여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농촌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닥친 비극은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 ‘지슬’에서 큰넓궤에 숨어 있던 주민들이 감자를 먹는 모습.
영화 ‘지슬’에서 큰넓궤에 숨어 있던 주민들이 감자를 먹는 모습.

▲‘잠복 학살’로 공포에 떨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제주사람들의 삶은 일제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몇몇 지주와 관리들이 곡식을 매점매석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은 일제의 수탈정책이었던 공출제도를 부활시켰다.

동광리는 4·3이 반발하기 전인 1947년 8월 보리 수매(공출)를 독려하기 위해 관청 직원들이 마을을 방문했다가 청년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에 반대한 이 사건으로 청년 3명이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동광리는 큰 사건 없이 평온함을 유지했다.

비극은 1948년 11월 15일 새벽에 닥쳤다. 광평리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다 내려온 군 토벌대는 동광리를 포위한 채 주민들을 무등이왓 마을로 집결시켰다.

당시 주민들은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해 마을에 남아 있었다. 토벌대는 마을 유지 11명을 추려내 밭에서 총살했다.

‘잠복 학살’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토벌대는 그해 12월 11일 마을에 숨어있던 청·장년 20여 명을 또 다시 학살했다.

다음날 유족들이 시신을 거두러 올 것을 예상한 토벌대는 마을에 잠복 중이었다.

토벌대는 시신을 수습하던 주민들을 덮쳐 죽창으로 찔렀다. 이들이 한 번에 죽지 않자 짚더미와 멍석을 덮은 후 불을 질렀다. 말 그대로 생화장이었다.

잠복 학살로 희생된 이들은 10여 명으로 대부분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었다.

 

큰넓궤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이곳을 지나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큰넓궤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이곳을 지나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큰넓궤로 숨어들다

집이 불타고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자 살아남은 동광리 주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처음엔 도너리오름 곶자왈로 피신했으나 토벌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큰넓궤(큰 동굴)로 숨어들었다.

‘궤’는 제주사투리로 암반과 암반 사이의 공간, 즉 천연동굴을 뜻한다.

큰넓궤 동굴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그곳을 지나면 길이가 180m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은 약 50일 동안 이곳에 은신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으로 집단 피난처는 발각됐다.

토벌대가 굴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주민들은 이불에서 솜을 뜯어내 고춧가루를 뿌린 후 불을 붙여 매운 연기가 동굴 밖으로 나가도록 부채질을 했다.

 

큰넓궤의 생활 유적인 옹기 파편들.
큰넓궤의 생활 유적인 옹기 파편들.

진입을 못한 토벌대는 굴 입구에 돌을 쌓아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후 철수했다.

다음날 청년들은 굴 입구에 쌓여 있는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그 해 12월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그러나 주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옷이나 신발은 변변치 않았지만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보며 쫓아온 토벌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주민들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에 있는 단추공장에 수용됐다. 일제시대 전복과 소라껍데기로 단추를 만들던 이 공장에 수용된 동광리 주민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가 집단 총살을 당했다.

동광리 마을의 4·3희생자는 큰넓궤에 숨어 있다가 정방폭포에서 총살당한 4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53명에 이르고 있다.

 

4·3평화기행에 나선 전국 기자단 앞에서 ‘잠복 학살’에 대해 설명하는 홍춘호 할머니(81)
4·3평화기행에 나선 전국 기자단 앞에서 ‘잠복 학살’에 대해 설명하는 홍춘호 할머니(81)

"밤하늘도 볼수 없던 시절...짐승처럼 살았지"

70년 전 11살 소녀는 햇볕 한줌 들어오지 않는 동굴에서 50일을 버틴 후 살아남았다.

지난달 4·3평화기행에 나선 전국 기자단 앞에서 홍춘호씨(81·여)는 당시를 회상하며 북받친 설움을 토로했다.

“짐승이 살아가는 것보다 못했다. 아버지한테 밤하늘의 별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가면 죽는다고 해서 나갈 수도 없었다. 대신 건장한 남자들은 밤이면 밖으로 나가 좁쌀을 구해오면 범벅을 만들어 식구들을 먹였다. 물은 동굴 천정에서 떨어지는 것을 빨아 마셨다.”

이들은 대변도 밖에 나가서 보지 못했다. 굴 한쪽에 놓은 항아리를 화장실로 정해 살았다.

홍씨는 단추공장 수용소에 끌려간 후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남동생은 피난시절 추위와 굶주림에 사망했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홍씨는 경찰관 가정에서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홍씨가 들려 준 박 모 할머니(작고)의 사연은 더욱 기구했다. 박 할머니는 잠복 학살 때 돼지우리(돗통시)에 숨어서 목숨을 연명했다.

11살 난 아들은 토벌대에 끌려가 죽창에 찔린 채 생화장을 당할 뻔했으나 간신히 대나무숲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그러나 박 할머니의 가족 중 5명은 희생됐다.

엉덩이 살점이 거의 다 떨어나갈 정도로 크게 다친 그의 아들은 몸은 물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박 할머니는 무당의 길을 걷게 됐다.

박 할머니의 아들은 성년이 됐지만 어린 시절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척이 있는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간 그는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넘어간 후 소식이 끊겼다.

무당이 된 박 할머니는 살아생전 ‘돼지우리에 숨어서 혼자 살아남았다’며 넋두리를 읊었고, 북으로 간 아들을 그리워하다 한 맺힌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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